청와대는 朴 전 대통령 시작과 끝점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선거의 여왕'
불통과 인사참사로 개혁의 동력 상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선거의 여왕'
불통과 인사참사로 개혁의 동력 상실
18년은 영애(令愛)로, 18년 야인(野人)으로, 다시 18년은 정치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헌정 사상 첫 대통령직 파면이란 참담한 결말을 맞았다.
지난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대통령 직선제 이후 첫 과반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며 광화문광장에서 연호하던 지지자들을 향해 "실천하는 민생 대통령이 돼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지 약 4년 3개월만이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의 인생을 담은 1993년 그의 자전 에세이집 제목처럼, 65년 박 대통령의 삶은 질곡된 한국 현대사처럼 파란만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첫 '여성대통령'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로 대한민국 역사상 첫 '부녀대통령'을 기록했지만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한 '파면된 대통령'이란 타이틀로 다시 한번 굽이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청와대는 박 전 대통령 인생사의 시작과 끝점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이 1963년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로부터 대통령의 딸 영애로서의 삶은 18년간 지속됐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1974년 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며 교수가 되는 걸 꿈꿨다. 하지만 그해 광복절 경축식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흉탄을 맞고 운명을 달리하면서 평범한 바람은 더욱 멀어져갔다. 모친의 빈자리를 채우며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활동하면서 대통령의 꿈이 자리잡았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지 25일만(11월 21일)에 두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나왔다.
다시 이때부터 18년은 은둔생활에 가까웠다. 다만, 육영재단 이사장·영남대 재단 이사장·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부친의 명예회복을 꾀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설때까지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권좌에서 내려온 그에게 세상은 등을 돌렸고, 최순실 국정농단이 배태된 것도 이무렵으로 추정된다.
세상으로 다시 걸어나온 건 1997년이었다.
그해 대선을 불과 여드레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46세였다. 그리고 새로운 18년의 시작이었다.
정치인 박근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듯 했다. 사람들은 그의 정치감각을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 부총재시절인 2002년 이회창 총재가 자신이 주장한 당개혁안(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을 수용하지 않자 탈당하는 강수를 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한나라당은 이후 이회창 후보의 대선패배와 이후 차떼기 사건수사,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사면초과에 내몰렸고, 그는 당을 살릴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판했다. 2004년 천막당사에서 보여줬던 원칙과 개혁의 리더십은 명실상부 차기 대권주자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당대표 재임 2년 3개월간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무렵이다.
2006년 5월20일. 서울시장선거 유세지원현장에서 괴한에게 커터칼 피습을 당해 오른쪽 뺨 11㎝가 찢겨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선거 격전지인 대전지역의 판세를 걱정하는 말, "대전은요?"로 단숨에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면모를 보였다.
2007년 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밀렸으나 또 다시 위기에 빠진 당의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개혁에 착수,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선에 승리하면서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 자격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했다.
대북·통일정책으로는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통일준비위원회,유라시아이니셔티브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임기 초반부터 빚어진 고질적인 불통문제와 잇따른 인사참사로 점차 개혁의 동력이 상실돼 갔다. 세계적인 경기부진 속에 경기부양과 구조조정이란 두 마리 토끼잡기식 경제기조도 점차 균형을 잃어갔다. 해외로 자본을 수출하는 '대외순채권국'이란 전무후무한 지위와 일본을 몇단계 제치며 상승한 국제신용등급, 1000억 달러 안팎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 등의 화려한 성적 뒤로 경기를 떠받치는 두 축인 수출과 내수는 점차 꺼져갔으며 공공부분을 포함한 국가부채는 1000조원을 넘어섰고, 가계부채는 1344조을 돌파했다.
임기 중반까지 '중국 경사론'으로 비쳐질 정도로 북한문제 해결을 위해 친중행보를 보였으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막지 못하고 결국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배치 결정을 내렸으며 과거사 도발에 나선 일본 아베 정권과는 급작스럽게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 맥락을 잃은 급회전 외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임기 4년차인 지난해 10월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에게 대통령 연설문과 각종 정부 문건들이 유출됐다는 보도를 시작으로 최씨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학사부정, K스포츠·미르재단 설립지원 등 최순실 게이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로 직무정지상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91일만인 2017년 3월10일, 미완의 개혁들을 뒤로 한 채 4년14일만에 청와대를 불명예스럽게 떠나게 됐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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