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인터뷰] 고위직 두루 거친 후 초임판사 자리로 복귀 성기문 원로법관

이진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4.23 17:23

수정 2017.04.23 17:23

“소액사건 갈등 치유… 지금이 가장 뿌듯”
소송가액 3000만원 이하 국민 생활과 가장 밀접해 당사자 목소리 경청하고 경륜 통해 조정.화해 권고
성기문 원로법관 사진=서동일 기자
성기문 원로법관 사진=서동일 기자

"30년 이상 법관 생활을 하면서 지금이 참 뿌듯한 순간입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소액과 집무실에서 우엉차를 내오던 성기문 판사(64. 사진)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성 판사는 올 2월부터 원로법관으로 임명돼 소액 사건을 담당한다. 춘천지법원장 등 법원 고위직을 두루 거쳐 초임 판사 시절 맡았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우려도 컸다. 고위직이 곧 '뿌듯함'의 징표로 인식되는 법조계 풍토에 초임 판사 자리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 역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경륜으로 갈등 치유, 41%가 조정.화해

성 판사는 "서열문화가 남아있는 법조계에서 법원장 출신이 1심 단독 판사로 간다는 데 대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주변에서도 소위 전관 변호사가 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단다.
그러나 그는 "법관으로서 소명은 중요한 가치인데 전관 변호사는 결국 인간관계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게 아닌가. 귀한 관계가 비즈니스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며 "내가 쌓은 법률 실력으로 국민께 봉사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결심의 배경에는 2017년 도입된 '원로법관제'가 있다. 원로법관제는 법원 고위직을 두루 맡은 경륜 있는 판사가 1심 재판을 전담하는 것이다. 지난 2월부터 성 판사를 포함, 5명의 원로법관은 서울중앙지법, 안산지원 광명시법원, 성남지원 광주시법원에서 활약하고 있다. 주로 소송가액 3000만원 이하 민사 소액사건 재판을 담당한다.

민사소액 사건에서 원로법관의 장점은 뭘까. 성 판사는 '경륜'을 꼽았다. 그가 뿌듯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 판사는 "소액사건은 국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분야"라며 "당사자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갈등을 치유하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히 법으로 무 자르듯 판결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이 이해할만한 결정과 조정.화해를 권고하는 것이 원로법관의 장점이라는 게 성 판사의 판단이다.

성 판사는 한 호텔에서 벌어진 손배소 사건을 예로 들었다. 소를 제기한 부부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부산의 한 호텔을 찾았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은 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호텔 관계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성 판사는 "사건을 살펴보니 배상을 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지배인을 불러 스위트 룸 1박 숙박권을 제공하라고 권했고 부부에게는 숙박권을 부모님께 선물해 효도하라고 제안했다. 결국 양 당사자가 만족하며 조정에 응했다"고 전했다.

그동안의 기록은 성 판사의 생각을 증명했다. 갈등을 중재하는 조정.화해 비율이 다른 소액사건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성 판사는 2월 원로법관 취임 이후 총 31건의 사건을 맡아 약 41%인 13건을 조정.화해 결정으로 이끌었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2016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법원 1심 소액사건 71만1578건 중 조정.화해는 3만8057건으로, 약 5.3%인 점과 비교하면 약 8배가 높은 것이다. 성 판사는 "법원장 출신 법관이 자신의 사건을 맡았다며 고마워하는 당사자도 있다"고 전했다.

성 판사는 원로법관 제도가 사법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16년 우리나라의 사법 신뢰도는 27%로, 34개국 중 33위를 기록했다. 그는 "법원에서 사법 신뢰를 높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원로법관제 역시 그 일환으로, 시민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생활밀착형 제도여서 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밝혔다.

■'원로법관'에게도 정년제한은 아쉬움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원로법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년과 관계없이 법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성 판사의 지적이다. 그는 "원로법관은 법원에서 '어른' 역할을 하는데 정년이 65세로 제한돼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원로 법관제와 유사한 미국의 시니어 저지(Senior Judge) 제도는 종신직인 연방대법관이나 연방판사들이 65세를 넘으면 본인 의사에 따라 통상 업무의 4분의 1 정도만 담당한다. 성 판사는 "우리나라는 원로법관이 기존 법관 정원을 차지해 원로법관의 업무량이 줄면 젊은 판사들이 고생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성 판사는 인터뷰를 마칠 때 즈음 기자에게 '소액판사 밥조'라는 이름의 메신저 채팅방을 보여줬다.
소액을 전담하는 판사들과 원로 법관이 점심 약속을 정하는 대화창이다. 대화창에는 봄을 맞이한 꽃 사진이 만개했다.


"원로 법관을 맡으면서 많이 배워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봉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요. 젊은 판사들과 허울 없이 지내면서 저도 젊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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