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는 아픈 다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빨리 500원을 받기 위해서다. 노인들은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질주했다.
지난 9일 오전 7시 서울 서초구 지하철 신반포역에서 내린 노인들이 '파랑새 어린이공원'을 향해 달렸다. 이미 공원에는 노인 100여명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일찍 온 노인들은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이들은 보도블록에 박스를 깔고 앉았다. 추운 날씨 탓에 팔짱을 낀 채 웅크렸다. 무엇을 기다릴까.
■500원 받기 위해 노인 400명 몰려
매주 목요일 오전 9시 30분이면 공원 인근 교회 2곳과 성당 1곳에서 노인들에게 500원씩 나눠준다. 노인들이 받는 돈은 모두 1500원. 남서울교회에서는 두유, 삶은 계란, 시루떡도 준다. 교회에서 번호표를 배부해 돈과 음식을 순서대로 준다. 89살 김모 할아버지는 쌍문동에서 첫차를 타고 새벽 5시 30분 도착해 번호표 10번을 받았다. "오줌 마려워도 꾹 참아"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비법에 대해 묻자 김 할아버지의 대답이다.
노인들은 1500원에 사실상 목숨을 건다. 끼니이자 유일한 수입원이다. 자신의 순서에서 동전이 그칠까봐 욕설과 드잡이가 일어난다. "아저씨, 아이 XX 왜 여기 박스를 둬. 아무리 공간이 있어도 그렇지" 한 80대 할아버지가 새치기를 시도하자 70대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노인들은 서로를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렀다.
오전 8시가 되자 공원에 300m 정도 되는 꼬불꼬불한 목숨줄이 생겼다. 공원 건너편에는 사립초등학교가 있다. 열 살 남짓한 초등학생이 바이올린을 등에 매고 등교했다. 흰색 스타킹에 교복을 입었다. 백발노인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아이들을 바라봤다. 노인이 입은 패딩은 기름 떼로 번들거렸다. 손자 등교를 돕던 70대 노인은 "애들 교육에 좋지 않은 것 같아 공원을 돌아온다. 어쩔 수 없이 마주친다"며 혀를 찼다.
오전 9시30분. 자원봉사자들이 동전과 음식을 줬다. 번호를 부르면 노인들은 일렬로 줄을 섰다. 노인들은 허겁지겁 삶은 달걀을 입에 우겨넣고 서초구 모 교회에서 컵라면을 준다며 달려갔다. 이날 노인 377명이 오갔다. 김민기 남서울교회 목사는 "사실 이런 일이 알려지는 게 조심스럽다"며 "IMF 때 노숙인 구제로 시작한 봉사지만 지금은 어르신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봉사에 참여하는 주영인씨(58·여)는 "1500원은 우리와 어르신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라며 "경제적 여유, 마음 여유가 없으셔서 줄서는 과정에서 화를 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인 절반 빈곤층...공적연금 강화해야
13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불평등한 고령화 방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66∼75세 노인빈곤율 42.7%(평균 10.6%), 76세 이상은 60.2%(평균 14.4%)로 38개 회원국 중 1위다. 노인빈곤율은 노인가구 중에서 소득이 중위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비율이다. OECD 보고서는 한국 노인빈곤율이 높은 이유로 "국가연금제도가 1988년 출범해 1950년대 출생한 경우 혜택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노인빈곤율 주원인으로 국민연금·기초연금 등 공적이전소득이 낮은 점을 꼽는다. OECD 평균 노인 전체소득 중 공적이전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58.7%다. 한국은 16.3%에 그친다. 반면 한국 노인 근로소득 비중은 63%(평균 23.9%)로 가장 높아 황혼에도 일하는 현실을 보인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노인빈곤을 막기 위한 노후소득보장 핵심은 국민연금"이라며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70%가 적정하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 보혐료를 상향하되 기초연금과 국민연금간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극빈층을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양의무제폐지 방안도 있다"며 "실제 자녀들이 돌보지 않는데도 기준 때문에 국민기초수급자에서 제외된 노인이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 '2016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2015년 55~79세 인구 중 월 10~25만원의 연금(공적연금, 기초연금 등 합산)을 받는 고령자 비율이 절반(49.5%)이다.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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