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산업화 겪은 기성세대 청년들의 우울증 이해 못해
年 546명 정신 문제로 자살..‘의지 아닌 병’ 인식이 중요
年 546명 정신 문제로 자살..‘의지 아닌 병’ 인식이 중요
서울의 명문대 대학원을 다니는 박정호씨(가명.28)는 지난해 12월 말 학교 정신건강센터를 찾았다.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명문고,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일을 미루는 게 반복됐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원인은 교수의 압박과 과로라고 판단했다. 의사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번아웃(Burn out) 증후군이 생겼다"며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박씨는 매일 아침 항우울제 1알을 먹는다. 그는 "밤을 새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버텨 졸업 근처까지 왔다"며 "교수는 스승이 아닌 보스였다"고 털어놨다. 이어 "약을 먹어가며 논문을 준비하지만 평생 이런 일을 할 생각하면 암담하다"며 "부모님, 지도교수 등 누구에게도 이런 어려움을 말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8일 서울연구원 '2016년 정신보건통계'에 따르면 전 연령대 가운데 20대 체감 스트레스가 58.2%로 가장 높았다. 스트레스 주요 요인은 '과도한 업무, 학습량'(25.4%), '대인관계'(17.4%)였다.
■사회적 편견, 치료 어렵게 해
세대별 가치관 차이는 20대가 마음의 병을 숨기는 원인이 된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사회 초년생인 20대가 정서적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가족, 직장 내 상급자는 '나약하다'는 식으로 치부하는 것.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빈곤했던 시기, 산업화를 일군 기성세대로서는 현재 20대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문제는 우울증 초기증상(무기력.불면)이 심한 20대가 '내 의지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치료를 미루거나 우울증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20대가 우울증과 정서적 어려움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집단문화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가정, 회사에서 개인보다 집단의 화목과 발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개인감정은 소외된다"며 "집단문화에 깔린 것은 경쟁으로, 경쟁 속에서 내가 우울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경쟁구도에서 뒤처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우울증을 방치하면 자살위험이 커진다. 사망요인 1위를 차지하는 20대 자살동기 중 가장 높은 비율은 '정신과적 질병문제'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정신적 문제로 인한 20대 자살자는 546명이다. 2015년 411명에 비해 약 33% 늘었다.
■20대 정신건강 적신호 '국민 공감' 필요
'젊은 놈이 왜 그래' 같은 조언은 20대 우울증 질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울증은 개인 정신력이나 가족력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원인이 분명한만큼 청년이 겪는 우울증이 '내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삼성서울병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홍진표 소장은 "20대 정신건강이 위기라는 데 대한 국민 공감이 필요하다"며 "우울증은 의지 문제가 아닌 병이어서 치료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신질환에 걸리면 평생 문제가 있을 것, 일반인 보다 열등하다는 인식 때문에 치료를 피한다"고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은 특수한 병이 아니다. 보건복지부 '2016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성인 4명 중 1명은 평생 한번 이상 정신질환을 겪는다. 이들 중 22.2%만 정신과 의사 등에게 정신건강 문제를 의논하거나 치료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46.5%), 미국(43.1%)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20대는 취업 시 진료정보가 노출될까 두려워 병원을 가지 않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비보험치료를 받기도 한다. 홍 소장은 "개인정보보호법상 질병치료력은 제 3자에게 제공될 수 없다"며 "의료보험공단에서 치료력을 조회하려 해도 정신과와 산부인과 치료력은 별도 신청이 필요한 항목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이런 오해가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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