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다보면 한번의 예외도 없이 반대방향으로 간다. 그래서 스마트폰 길찾기 애플리케이션(앱)을 늘 쓴다. 운전할 때도, 대중교통 탈 때도, 걸어갈 때도 스마트폰이 가라는 대로 간다. 그래서 스마트폰에는 늘 내 위치정보 접속을 허용해 놓고 산다. 스마트폰이 내 위치를 알아야 길을 가르쳐줄 수 있으니.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들어온 게 2009년이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고 3년 가까이 한국에는 발을 못 들였다. 여러 숨은 이유가 있지만 아이폰을 한국에 들이지 못하도록 한 가장 큰 명분은 위치정보 수집이었다. 아이폰이 사용자의 위치정보를 수집하는데, 애플은 한국에서 위치정보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았으니 한국인들의 위치정보를 수집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옥신각신 끝에 2009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아이폰 수입을 허용했다. 수입허용 결정 당시 방통위원들은 걱정했다. 당장 아이폰 서비스는 개인 프라이버시와 무관하지만, 향후 기술 발전에 따라 정보 축적 등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소지가 생기면 어쩔 거냐고. 당연한 걱정에 방통위의 담당 국장은 "기술발전이 빨라서 향후 생길 수 있는 여러 우려를 예의주시하겠다"며 "정부와 소비자가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다. 담당 공무원이 '예의주시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자 방통위원들도,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정책을 믿어줬다. 그렇게 수입된 아이폰은 한국 스마트폰 혁명의 촉매가 됐다.
한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 창업자가 블록체인 애플리케이션 개발 법인을 설립하고는 법인계좌를 만들러 은행에 갔단다. 사업내용을 쓰는 서류에 '블록체인…'까지 썼는데 지켜보던 은행 직원이 손사래를 치더란다. 블록체인의 블록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법인계좌 못 만드니 다른 내용으로 쓰라고. 딱히 정해진 정책 없이 안 된다고만 하니 현장에서는 이런 슬픈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되고 있다.
블록체인, 암호화폐에 대한 정부의 정책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달라는 산업계의 요구는 이제 말하면 입 아픈 얘기가 됐다. 벌써 2년 이상 기업들은 블록체인, 암호화폐 사업을 해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다. 정부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대통령까지 네거티브 규제를 정착시키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네거티브 규제라는 게 "법에 금지조항 없으면 그냥 하세요" 하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혁신기술이라고 세계가 주목하는 블록체인에 그 네거티브 규제를 적용하면 될 텐데 왜 이리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블록체인 정책에서 공무원의 진짜 할 일은 '허용' 그다음이 아닌지 따지고 싶다. 일단 허용하고 빠른 기술발전에 맞춰 시장을 예의주시하고 부작용을 살피는 것. 그리고 부작용이 있다면 대책을 만드는 것. 그것이 성실한 관리자인 공무원의 역할 아닌가 말이다.
부작용이 두려우니 아예 블록체인은 정책조차 만들지 않는 것은 공무원이 할 일이 아니다. 부작용이 걱정되니 아이폰을 아예 수입금지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찌 됐을지 뒤집어 봐 줬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디지털뉴스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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