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은 지난해 11월 이례적인 성명을 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법부 비판에 대한 반박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이민 행정명령이 헌법 위반이라고 판결한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 비난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는 없다"면서 "우리에게는 자신 앞에 선 모든 이에게 공평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판사 집단만 존재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독립적인 사법부는 우리가 모두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드문 일이다. 미국 언론은 로버츠 대법원장 개인적 차원에서도 이를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트럼프는 사법부를 수시로 비난해 왔다. 자신과 관련된 소송을 담당한 판사부터 정책을 무력화한 판사까지 "끔찍하다"는 등의 공격을 퍼부었다. 불리한 판결을 수차례 내린 제9연방항소법원을 분할해 버리겠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그럼에도 침묵을 지켜왔다. 트럼프에 대한 최근 반박 성명이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사법부의 정치화 방지'가 로버츠 대법원장의 목적이라고 분석한다. 미국 연방 사법부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공화당 대통령은 보수성향, 민주당 대통령은 진보성향 판사를 임명한다. 우리 식으로 보면 '사법부 장악'을 위한 수단이라고 비난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임명된 판사들이 정파적 고려에 따라서만 판결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법리에 바탕을 둔 판결을 내리기에 대체로 수긍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렛 캐버노 판사 임명으로 보수파가 다수를 차지한 대법원을 자신의 정치적 동지로 여기고 있다. 민주당 정부 시절의 정책들을 무효화하거나 반이민 정책 등의 시행에 있어 대법원이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성명은 그런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에 반하는 것이다. 찬물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념적·정파적 고려보다 사법부 독립을 우선하겠다는 선언이라는 분석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됐다.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도 불구속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른바 사법농단 관련 검찰 수사가 일차 마무리된 셈이다. 애초부터 검찰 수사의 타깃이 양 전 대법원장이었으니 일단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이번 검찰 수사는 사상 초유의 연속이었다. 대법원 압수수색, 전 대법관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대법원장 구속 등. 결국 전직 사법부 수장의 구속 기소로 일막은 막을 내렸다. 그와 함께 대한민국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정부·여당이 앞장서는 판사와 판결에 대한 공격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전직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대법원장 재판이라는 이막이 열린다. 경우에 따라 추가 기소되는 법관도 나올 수 있다. 법관에 의한 (전직)법관 재판이라는 또 다른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다른 범죄도 아닌, 재판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본질이다. 무죄, 유죄 어떤 결론이 나와도 법원이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전·현직 대법원 수뇌들이 마주할 가능성도 크다. 길고 지루한 재판 과정이 사법부 붕괴와 몰락으로 이어질지, 신뢰 재건으로 기사회생의 주춧돌이 될지 예측이 쉽지 않다. 주목할 것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처신이다. 김 대법원장은 "국민에게 사과한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관건은 말보다 행동이다. 이념적·정파적 고려보다 사법부 독립을 우선하는지, 그래서 "이런 독립적인 사법부는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지 말이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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