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SS, 압력만으로 얼음을 제어하는 기술 개발
#. 상온이나 심지어 물이 끓는 고온에서 얼음이 얼 수 있을까? ‘따뜻한 얼음’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지만, 액체가 고체로 변화하는 응고 현상은 온도뿐만 아니라 압력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건만 맞춘다면 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조건이 대기압의 1만배 이상인 기가 파스칼(GPa) 정도의 초고압이라 실현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져 왔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이 초고압의 극한 환경을 구현해 상온에서 얼음을 만들고 형상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바이오·식품·의료, 항공우주 등 다양한 산업에 적극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KRISS 융합물성측정센터 극한연구팀은 자체 기술로 물을 1만 기압 이상 압축해 얼음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또 압력 조건을 제어해 3차원의 얼음의 2차원 변화를 관찰하고 얼음의 형태 변화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이번 기술은 온도에 구애받지 않고 얼음의 크기나 형태 및 성장하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얼음은 육각판, 기둥, 뿔 등 만 가지 이상의 결정을 가진다. 다양한 형태의 얼음결정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산업적 활용도 또한 뛰어난데, 특히 얼음결정을 온도가 아닌 압력으로 제어하는 경우 기존 얼음이 가졌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식품이다. 일반 대기압에서 육류를 냉동시키면 바늘처럼 뾰족한 육각형 얼음결정이 발생해 세포와 조직을 손상시킨다. 냉동실에서 꺼낸 고기의 육질과 맛이 떨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고압에서 냉동시키면 뾰족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얼음결정이 생겨 육질을 보호할 수 있다.
비행기에 생기는 얼음은 기체 결함과 추락까지도 유발할 수 있다. 눈이 오는 날은 물론, 영하 40 ℃까지 떨어지는 고도 1만 m 상공에서는 비행기 날개에 결빙이 일어난다. 얼음결정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면 날개 모양에 변화를 일으키고 양력을 떨어뜨린다. 그만큼 얼음결정의 성장속도와 형태 제어는 비행기 안전과 운행 효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KRISS 연구팀의 이윤희, 이수형, 이근우 책임연구원은 초당 대기압의 500만 배까지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실시간 동적 다이아몬드 앤빌셀(anvil cell)’ 장치를 개발, 고압에서의 얼음 성장에 적용했다. 그 결과 상온에서 물을 압축하여 고압얼음을 형성하고, 동적인 압력 조작을 통해 3차원 팔면체 얼음을 2차원 날개 모양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당 기술은 초고압 환경을 구현하는 다이아몬드 앤빌셀에 구동제어, 분자 진동 측정기술 등을 동기화해 물질의 압력, 부피, 영상, 분자 구조 정보까지 동시 측정할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이다.
기존에는 유사한 연구를 위해 주로 온도나 농도 제어에 주목했지만, 열 및 입자의 전달 속도 한계로 결정의 빠른 성장을 관찰할 수 없었다. 반면 압력은 즉각적이고 균일한 적용이 가능하여 기존의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다. 물 분자의 결정화 과정을 상세히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KRISS 이윤희 책임연구원은 “고압 냉동기술을 활용하면 식품의 맛과 신선도를 유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얼음결정과 냉동공정을 만들 수 있다”며 “이번 기술을 현재 신선식품의 물류에 사용하는 콜드체인(cold chain) 시스템에 적용하면 식품의 상품성이 더욱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KRISS 이근우 책임연구원은 “이번 기술은 다양한 결정구조에 활용할 수 있어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라며 “초고압과 같은 극한 환경에서는 새로운 물질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어 한계에 부딪힌 과학기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라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은 이번 연구 성과는 세계 3대 학술지인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IF 9.661)에 게재되었다.
seokjang@fnnews.com 조석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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