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이날 "이 여사가 오후 11시37분 별세했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3월부터 그동안 노환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했고, 며칠 전부터는 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전날(9일)부터 병세가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면서 유족들은 물론 동교동게 등 정치권을 안타깝게 했다.
이 여사의 장례는 사회장(葬)으로 치러진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과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조만간 구성될 예정이다.
발인은 오는 14일 오전 6시로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1922년 서울 출생인 이 여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이화여고·이화여전을 거쳐 해방 후에는 서울대 교육학을 졸업했다. 이화여대에서는 여성문제 등을 강연했고 이후 여성 인권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1962년 부부로 인연을 맺은 이 여사는 이후 47년간 옥바라지와 망명, 가택연금 등 독재정권에 맞선 야당 지도자의 아내로, 정치적 동지로 모진 세월을 함께했다.
특히 마흔의 나이에 2살 연하의 김 전 대통령을 만날 당시에는 사별한 전(前) 부인 사이에서 이미 홍일·홍업 형제가 있었다. 이 여사는 결혼 다음해 홍걸씨를 낳았다.
김 전 대통령 곁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 뒤에는 1997년 12월 김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듬해 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영부인으로 남북교류 확대·평화와 인권 신장 등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여사에게 가장 어려운 시절 중 하나는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고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압 끝에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였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독려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 여사는 묵묵히 남편을 지지했다.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지만 곁에는 늘 이 여사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투옥,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2년 정계은퇴뒤 미국 망명, 1985년 귀국해 가택연금도 겪어야 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 당선 뒤 영부인 신분이 된 이 여사는 "국가 지도자의 부인도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김 전 대통령을 도와 여성 인권 향상 등을 위해 노력했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뒤에는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으로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cerju@fnnews.com 심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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