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출신 박상진 의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과 정반대되는 인물
독립운동가 체포하고 고문..울산지역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사실
해방 후에도 반민특위 15명 암살 모의하다 덜미..이승만 비호로 무죄
친일경찰에서 국군으로 전직 후 뇌물수뢰한 혐의 적발로 공직 마감
뻔뻔하게도 제5대 울산 민의원 선거에 출마까지..다행히 낙선
울산시가 독립운동가와 후손 예우에 앞장서 지역 자긍심 되찾아야
독립운동가 체포하고 고문..울산지역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사실
해방 후에도 반민특위 15명 암살 모의하다 덜미..이승만 비호로 무죄
친일경찰에서 국군으로 전직 후 뇌물수뢰한 혐의 적발로 공직 마감
뻔뻔하게도 제5대 울산 민의원 선거에 출마까지..다행히 낙선
울산시가 독립운동가와 후손 예우에 앞장서 지역 자긍심 되찾아야
【울산=최수상 기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비롯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일본에서 일왕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된 서진문 선생 등 울산 출신으로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받은 95인의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시민들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울산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다.
반면 3.1절과 광복절이면 낯 뜨거울 정도로 울산시민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인물이 함께 떠오른다. 바로 울산 출신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이다.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한 친일경찰의 대명사이다. 전국 곳곳에서 자행한 악행 때문에 해방 후 가장 먼저 붙잡아 처단해야 하는 인물 1순위로 손꼽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 '울산의 인물'로 부활할 뻔
증언에 따르면 노덕술은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기술로 참혹하게 고문하는 일을 즐겼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고생해야 했다. 해방 후에도 오히려 친일매국노를 처단하려는 반민특위 관계자 15명을 암살하려다 발각돼 체포됐지만 그를 뛰어난 고치안기술자로 인정한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로 무죄로 풀려나왔고 다시 경찰일을 하게 된다. 이후 노덕술이 해방 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을 모욕하고 뺨을 때린 일화가 대표적이며 많은 이 사실은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또 울산 출신으로 1930~40년대 국내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수배, 체포를 거듭하며 투옥돼 모진 고문을 겪었던 독립운동가 학림 이관술 선생 역시 1941년 일제에 체포된 뒤 노덕술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반죽음 상태로 풀려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울산시는 지난 2014년 <울산의 인물> 자료집 발간을 앞두고 공청회에서 '울산의 인물' 587명에 노덕술을 포함시켜 엄청난 비난을 자초했다. 당시 새누리당이 집권하던 울산시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일본관광객 유치와 울산지역 역사인식
다행히 시민들의 반발로 무산됐지만 울산에서는 이후에도 일본관광객 유치라는 명목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수많은 울산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데려간 일본군 장수들의 대형 동상을 공원에 세우고, 또 일제강점기 수산물 수탈에 앞장섰던 일본인 거주지를 방어진에 복원하려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추진돼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시민 정모씨(76)씨는 “노덕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경찰로, 절대 잊혀 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돼 있다”며 “노덕술과 지금도 계속되는 친일행각으로 실추되고 있는 울산의 자긍심을 되살려기 위해서는 울산시가 전국 어떤 곳보다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예우하는 일에 앞장서 할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울산에서 독립운동관련 건국훈장(1~5등급)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해 불과 40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박상진 의사의 경우 3등급에 머물러 서훈 등급 논란이 일고 있다.
미서훈 독립운동가로서는 서진문 선생의 스승이자 보성학교 설립자로 항일운동을 벌인 성세빈 선생과 1930~40년대 국내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수배, 체포를 거듭하며 투옥돼 모진 고문을 겪었던 학암 이관술이 대표적이다.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울산 출신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이승만 정권시절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 울산서 일본인 잡화상에 점원하다 친일경찰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노덕술은 1899년 6월 1일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했다. 그 후 울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가 잠시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에 지원, 1920년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됐다.
노덕술은 울산경찰서에서 근무하다 1927년 동래경찰서로 근무처를 옮겼고 1928년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행휴교사건을 수사하다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해 고문했다. 결국 김규직은 이듬해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승승장구하던 노덕술은 전국 곳곳에서 일본에 동조하면서 악랄한 행적을 보인다.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해 다시 울산경찰서 경부로 근무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는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서는 등 일본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다.
■ 장택상 저격 혐의로 박성근 고문치사후 도주
일제말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가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자 월남했다.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저격하려했다는 혐의로 붙잡은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도주했다. 도주 중이던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아예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붙잡혔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헌병으로 전직해 1950년부터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장, 서울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지내다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 재임 시 뇌물수뢰 혐의로 1955년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6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됐다.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8년 4월 1일 사망했다.
■ 친일인명사전에 울산 출신 17명
15일 울산문화예술회관에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행사에서 한 시민은 “노덕술이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면 울산시민들은 악질 친일경찰을 선거에서 당선시킨 정치적 치욕까지 안을 뻔 했다”며 “울산사람으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울산출신 인물은 총 17명이다. 노덕술처럼 대부분 친일경찰이었고 1명은 경기공립고등학교 교장과 울산농고 교장, 경북대 교수, 전북매일신문회장 등을 지낸 박관수(1897~1980). 또 다른 1명은 대동광업을 설립한 뒤 다양한 친일행적과 전쟁동원에 앞장서 일제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은 이종만(1986~1977)으로, 해방 후 월북해 애국열사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박관수와 이종만은 지난 2014년 울산시가 선정한 '울산의 인물'에 포함된 인물이기도 하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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