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오는 10월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 갑작스레 의회를 멈추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격렬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총리 반대파들은 여당이 협상 없는(노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이기 위해 의회를 마비시켰다고 주장했으나 총리측은 브렉시트에 앞서 민생 법안들을 서둘러 처리하기 위해 의회 일정을 조정했을 뿐이라며 브렉시트에 대해 논의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은 28일(현지시간) 의회의 현재 회기를 종료하고 새로운 회기를 시작하도록 승인한다고 밝혔다. 앞서 브렉시트 강경파로 유명한 제이콥 리스 모그 하원 원내 총무는 휴가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스코틀랜드 별장에 찾아가 허가를 얻어냈다.
■브렉시트 논의 시간 2주 줄어
영국 의회는 보통 1년 단위로 진행되며 1개 회기 중에 4번을 쉰다. 현재 영국 하원은 여름 휴회 중이며 9월 3일에 다시 열릴 예정이었다. 하원의원들은 기존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9월 3일에 등원해 같은달 12일까지 약 2주간 의정활동을 하다가 10월 8일까지 전당대회 휴회로 다시 쉬고, 10월 9일부터 안건을 처리한다. 10월 17~18일에는 브렉시트를 앞두고 EU 정상들의 마지막 회의가 열리며 영국은 10월 31일에 EU를 탈퇴한다. 날짜 따지면 하원의원들은 앞으로 브렉시트 전까지 약 5주간 브렉시트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존슨 총리는 28일에 여왕에게서 오는 10월 14일 '여왕 연설'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영국에서는 의회의 새 회기가 시작될 때마다 왕이 출석해 국정 연설을 하며 의회는 연설에 앞서 일정기간 정지된다. 이번 조치에 따라 영국 의회는 오는 이달 9~12일 사이 정회되면서 현재 회기를 끝내고 10월 14일 연설을 계기로 새로운 회기를 시작한다. 회기가 바뀌면 전기에 미결된 모든 법안은 폐기되며 이를 처리하려면 다시 상정해야 한다. 존슨 총리는 28일 하원 의원에 돌린 공지문에서 현재 회기가 340일을 넘겨 400년 의회 역사상 최장 기간 지속됐다며 당장 해결해야할 보건, 치안, 사회기반시설 관련 법안들이 쌓여있지만 처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요한 법안 처리를 브렉시트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의회를 재 시작해 법안들을 다시 상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하원에서 브렉시트를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3주도 채 남지 않게 됐다.
마이클 고브 영국 국무조정실장은 BBC와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가 의회의 브렉시트 논의를 방해하려는 정치적 시도냐는 질문에 "절대로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존슨 총리는 급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회기를 다시 시작하길 원하며 의원들에게는 다음주 복귀(9월 3일) 이후 브렉시트를 논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쿠데타 멈춰라' 시위...야권 뭉쳐 존슨 저지
그러나 이날 제 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키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며 총리가 벌이는 짓은 민주주의를 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렉시트에 회의적인 스코틀랜드의 니콜라 스터전 자치수반 겸 스코틀랜드국민당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킨 총리의 행위가 "독재"라며 의원들이 다음주에 총리를 막지 못한다면 "오늘은 영국 민주주의 어두운 역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에 정치 중립을 표방하던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나는 정부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만약 의회 정회가 사실이라면 이는 헌법적으로 포악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존슨 정부 출범과 함께 물러난 필립 해먼드 전 재무장관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회가 정부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이는 헌법 유린이다"고 밝혔다.
이날 정회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 총리 관저 앞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몰려나와 "쿠데타를 멈춰라"고 외치며 EU 깃발을 흔들었다. 주요 대도시에서도 수천명의 시위대가 운집했으며 영국 의회 사이트에 올라온 정회 반대 청원에는 100만명이 넘는 참여자가 모였다. 노동당 측은 3일 하원이 다시 열리면 즉시 불신임 투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나 보수당 내 반란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강행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일간지 가디언은 관계자를 인용해 야당들이 노딜 브렉시트 발생시 EU 탈퇴를 의무적으로 연기하는 법안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민간 펀드회사 대표로 반(反) 브렉시트 활동을 벌여왔던 지나 밀러는 고등법원에 이번 조치의 적법성을 검토해 달라는 신청서를 내기도 했다.
이 와중에 노딜 브렉시트를 지지해 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8일 자신의 트위터에다 "존슨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노리고 있는 코빈 대표는 뜻을 이루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존슨 총리는 정확히 영국이 찾던 지도자이며 훗날 '위대한 인물'로 증명될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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