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질본 청 승격 조직개편안 논란
'감염병연구소' 보건복지부 이관 '되레 축소' 비판
질병관리청 독립성 높여야하지만 홀로 대응 못해
독립성 보장해주되 정부 연결망 속에 존재해야
보건복지부·지자체 잘못있지만 제 역할 필요
[파이낸셜뉴스]
'감염병연구소' 보건복지부 이관 '되레 축소' 비판
질병관리청 독립성 높여야하지만 홀로 대응 못해
독립성 보장해주되 정부 연결망 속에 존재해야
보건복지부·지자체 잘못있지만 제 역할 필요
정부가 내놓은 질병관리본부의 청 승격안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겁습니다. 지난 3일 조직개편 내용이 발표되자마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질본의 인력과 예산이 되레 줄어든다는 지적입니다. 정부가 국민 여론을 무시한 채 부처 이기주의에 매몰돼 알맹이를 쏙 빼놓은 질본의 청 승격안이 나왔다는 비판입니다.
감염내과, 예방의학 전문가들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국민청원까지 등장했습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조직개편안 발표 이틀만에 전면 재검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조직개편안은 정말 부처 이기주의의 결과물이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두루 취재를 해봤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 논란의 실마리를 풀어볼만한 생각의 틀거리 하나를 끄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보겠습니다.
'고쳐 쓸 것인가 vs. 없애버릴 것인가'
정부는 이번 조직개편안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방향 중, 고쳐 쓰는 방법을 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본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없애버리기 보다는요.
■구조실패 책임, 해경을 없애버리다
잠시 세월호 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구조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해체한다'는 말 그대로, 공중분해 시킨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질병관리본부가 '본부'에서 '청'으로 승격하는 것과 반대로 '해양경찰청'은 '해양경비안전본부'로 격하됐습니다. 해양수산부 외청이던 해경은 새로 신설된 국민안전처 소속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질본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제 기능을 못했다는 이유로 권한을 빼앗아 다른 조직에 넘겨버린 겁니다. 물론 문재인 정부 이후 다시 해수부 외청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해경은 매우 중요한 조직입니다. 해군이 수행해야할 전쟁을 제외하고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해경이 도맡는다고 보면 됩니다. 선박화재 진압, 구조, 수사, 도서지역 치안관리, 중국어선 단속 등이 모두 해경의 업무입니다. 소방은 내륙, 내수면만 담당합니다.
당시 정부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겁니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해경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습니다. 무엇이든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이때 정부는 해경의 '개혁' 대신 '해체(사실상 본부 격하)'를 택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당시 해경이 지금의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여서 입니다.
이번 정부의 조직개편안에 대한 논란의 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1)질본의 감염병연구센터 감염병연구소로 확대한 후 보건복지부로 이관한다.
2)일관된 감염병 대응 정책 수립·집행을 위해 지자체 소속 보건소 기능 일부 혹은 전부를 질병관리청 소속으로 돌릴 필요성이 크지만,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1번, 2번을 설명하기 전에 잠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감염병연구소를 떼어가는 탓에 질본의 인력·예산이 줄어든다'는 비판입니다.
■청 승격 후 되레 줄어든 인력·예산?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질본이 청으로 승격하면 거꾸로 인력·예산이 줄어든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질본은 현재 정원 907명, 예산 8171억원입니다. 센터(연구소)가 빠져나가면 정원은 746명, 예산은 6689억원으로 줄어듭니다. 그럴싸한 설명이지만 이걸 확정안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질본이 청으로 승격한 후 정원·예산 확대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면 맞는 말이겠지만, 정원·예산은 늘어날 겁니다. 국민적 관심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은 공무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직접 챙기는 이슈이기도 합니다. 승격될 질병관리청의 조직이 국민들이 질본에 보내는 성원에 상응하는 만큼 늘어나지 않으면 지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공무원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지금은 큰 틀만 확정된 터라 정확한 조직 확대 규모를 발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센터(연구소)의 보건복지부 이관에 따른 정원 변동만을 이야기한 것 뿐입니다.
위 수치들는 지난 3일 조직개편 브리핑 당시 언론 질의응답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승격될 질병관리청의 정원·예산 규모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질병관리청의 규모는 "아직 구체적인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덧붙여 현재 질본 정원·예산 규모, 연구소 등 일부 기능의 보건복지부 이관에 따른 변동된 질본의 정원·예산 규모까지 답했습니다.
아마 정원·예산 확대 규모를 둘러싼 논란이 지금 단계에서 발생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좀 더 나중의 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 숫자도 솔직히 밝혔을 테고요. 승격될 질병관리청의 규모에 대한 내용은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고쳐 쓰기로 했다'는 판단과 1번, 2번을 연결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그간 제 역할 못한 보건복지부, 지자체
감염병 전문성을 갖춘 조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은 이후 실질적인 역학조사 기능 확보 등 제도개선이 이뤄졌지만 그 때 뿐이었을 겁니다. 감염내과, 예방의학과 전문가분들에겐 부족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었을 겁니다. 메르스의 교훈을 잊고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지적이 큽니다. 저도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감염내과, 예방의학과 전문가분들의 누적된 보건복지부에 대한 불만, 불신이 매우 크다고 들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복지 분야 공무원들이 보건 분야 고위직마저 독식하고, 질본까지 승진을 위한 낙하산 기관으로 전락시켜버렸다는 비판도 컸습니다.
보건소 소속 인력들의 불만도 상당합니다. 보건소는 기초지방자치단체 소속입니다. 공공보건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지자체 내에서 그간 소외당했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지역의 한 보건소장은 "공중보건분야는 정책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기관장의 관심 여부에 따라 이같은 기능이 쉽게 흔들려 버린다"고 지적했습니다. 보건소장 자리도 내부 승진보다는 기관장과의 친분 여부에 따라 임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감염병도 보건 영역의 일부
여기서 정부의 고민이 시작됐을 겁니다. 질본을 청으로 승격하고, 하루빨리 정부의 감염병 대응 능력을 향상시켜야하는 미션이 떨어졌습니다. 질병관리청의 권한을 어디까지 그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집니다. 거꾸로 말하면 보건복지부와 지자체 소속 보건소의 권한을 어디까지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됩니다.
'감염병에 대한 권한을 모두 질병관리청으로 넘겨줘야하는 걸까, 아니면 보건복지부, 보건소의 역할을 인정해주고 제 역할을 하도록 고쳐써야하는 걸까.'
질병관리청에게 감염병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는 방안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안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보건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고민을 시작했을 겁니다. 감염병 연구와 대응은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건분야의 큰 틀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질병관리청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고 해도 결국 함께 일해야 합니다. 공공·민간 의료 기관, 지자체 등과 함께 대응해야하죠.
청 승격을 통해 확보된 독립성을 바탕으로 전문성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는 한편, 보건 정책의 큰 그림 아래서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점이 고려됐다고 봅니다.
유사한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2014년 11월 신설된 '국민안전처'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안전분야 전문성 확보를 목적으로 당시 안전행정부의 안전 업무를 떼어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난·안전 영역은 타 부처와 지자체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국민안전처 조직 하나로는 협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등을 감안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7년 7월 현재 행정안전부로 다시 흡수됐습니다.
■감염병 연구, 보건복지부만의 업무 아니야
1번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해볼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범 부처 감염병 R&D 강화도 이번 개편안 마련에 주요 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감염병연구소를 보건복지부로 이관키로 한 배경 말입니다. 현재 감염병 연구는 각 부처에 산재해있습니다. △사람·인수공통 감염병-질본 산하 감염병연구센터 △야생동물-환경부 △가축·동물-농림축산식품부 △기초연구-과기정통부 등 분산돼있습니다.
이처럼 여타 부처에 유관 업무가 분산된 탓에 조정이 필요한 경우, 국무총리 산하에 위원회를 둡니다. 겹치는 연구는 없는지, 함께 진행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는 연구가 있는지 여부 등을 전문가들이 살펴보는 것이지요. 그래도 총괄부처는 필요합니다. 업무 효율성을 따져봤을 때 질병관리청 보다는 보건복지부가 총괄 부처를 맞는 것이 낫다는 판단입니다.
이같은 장기적인 감염병 R&D 기능은 복지부로 넘겨 범 부처 감염병 연구와 시너지를 내고, 질병관리청은 내부 연구 기능을 추가해 진단키트 개발지원, 역학연구 등 단기 대응 방안 연구를 맡기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전면 재검토 지시로 이같은 구상은 크게 수정될 걸로 보입니다.
■243개 지자체, 지역 현실은 지자체가 잘 알아
지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간 감염병 대응, 공공보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방역에서만큼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해줬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워킹 스루, 익명검사 등 지자체 방역 대책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사례가 많습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행정력도 총 동원했습니다. 감염병 방역 문제는 이미 지자체장의 최대 평가 척도가 돼버렸습니다. 그간 등한시 했더라도 앞으론 지속적인 관심 사항으로 두고 관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중앙정부와 질본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된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지역 현실을 가장 잘 아는 건 지자체입니다. 만약 보건소 기능 전부 혹은 일부를 떼어내 질병관리청 산하로 둔다면 지역 실정과 유리된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국 광역 시·도는 17개이고 그 밑에 기초 시·군·구가 226개입니다. 이미 거대 조직을 갖춘 중앙부처들도 모든 지자체 실정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정확히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 정부가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한 광역 시·도 관계자는 "질본이 원칙적인 대응 방법을 내려주면 지자체가 많은 부분을 지역 실정에 맞게 수정해서 대응했다"고 전했습니다.
■질병관리청 독립, 부처 간 연결망 속에서 가능
정리하자면 1)'보건분야'라는 큰 그림과 2)지역실정에 적합한 대응의 중요성을 감안해, 그간 잘못한 점이 많았던 혹은 그렇게 여겨지는 두 조직을 '제 역할을 하도록 고쳐 써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 조직개편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모든 정책은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100% 옳은 방법은 없습니다. 감염병 대응 관점에서만 보면, 모든 사람들이 집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방역 수칙을 이행하면서 우리 사회를 굴려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개편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염병 관점에서만 보면 질병관리청에 모든 권한을 몰아줘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관리청의 독립성은, 보건분야, 더 나아가 전체 정부 부처의 연결망 속에서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조직개편안이 단순한 부처 이기주의로만 매도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이같은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전 국민적 응원을 받고 있는 질병관리본부의 '청' 승격이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소 긴 '현장클릭'을 적어봤습니다. 부디 정부, 국회로 이어지는 의견수렴 과정에서 질본이 효율적인 감염병 대응을 위한 조직으로 거듭나길 바래봅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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