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선박이 막아버린 수에즈 운하
"구조적 문제가 불러온 예고된 참사"
도선사는 뇌물에만 관심..시설 투자도 미흡
선박 초대형화 따른 기술·물리적 투자 부족
[파이낸셜뉴스]
"구조적 문제가 불러온 예고된 참사"
도선사는 뇌물에만 관심..시설 투자도 미흡
선박 초대형화 따른 기술·물리적 투자 부족
말보로 운하(Marlboro canal)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독자분들이 알고 계신 대표적인 담배 브랜드입니다. 그 장소가 어디냐고요? 바로 최근 초대형선박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좌초돼 전 세계 이목이 쏠린 수에즈 운하입니다. 왜 이같은 별칭으로 불릴까요.
전직 항해사 A씨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처음 수에즈 운하에 갔을 때였습니다. 수에즈 운하 소속 도선사가 선박에 탑승했습니다. 수에즈 운하에 처음 방문했다고 말을 건네니 운하를 사진으로 남겨두라고 권하는 겁니다. 그의 권유에 따라 사진을 찍자, 친절하던 그가 돌변했습니다. 운하는 군사지역이니 벌금을 내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알고 보니 뇌물을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말보로 한 보루를 건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선사(pilot)는 선박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선박은 조종이 까다롭기 때문에 항구에 접안하거나 좁은 해역을 지날 때 그 지역의 조류, 바람 등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도선사가 선박에 올라 선박을 조종합니다. 지역에 따라 의무적으로 도선사를 탑승시킵니다. 수에즈 운하도 강제도선 구역입니다.
사실 에버기븐호 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다수 선원들은 사고 발생 장소가 수에즈 운하라는 걸 보고 도선사의 실수 탓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선박의 안전한 운항은 뒷전이고 뇌물을 최대한 많이 뜯어가려는 수에즈 도선사들을 떠올린 것이죠. 말보로 운하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별칭입니다.
A씨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겠습니다.
"도선사와 함께 다섯 명 정도가 더 선박에 올라왔습니다. 정체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뇌물을 챙겨갈 짐꾼들을 데려온 거였습니다. 황당했죠. 전 세계 어느 항구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어요. 뭐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서 뇌물을 뜯어낼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에버기븐 사고에 대해서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도선사가 굉장히 까탈스럽거나 과한 것들을 요구하는 탓에 선박 운항에 소홀했다가 사고가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수에즈 도선사들의 선박 조종 실력 또한 그리 높지 않다고 합니다. 국내 도선사들은 5년 이상의 선장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3등 항해사에서 시작해 선장까지 오르는데 10년 안팎이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 15년은 바다에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수에즈 도선사들은 최소한의 교육만 받은 채 도선사 업무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간 문제 될 게 별로 없었습니다. 수에즈 운하에는 거센 조류나 복잡한 지형이 없습니다. 잔잔한 수면에서 선박을 운항하는 데는 그리 큰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컨테이너 선박이 대형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고가 난 에버기븐호는 길이는 400m에 달합니다. 세로로 세우면 에펠탑보다 높습니다. 선박이 크고 무거울수록 운전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람에 취약합니다. 사건 발생 초기 좌초 원인을 갑작스러운 돌풍에 따른 영향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찌 저런 큰 배가 바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냐" "배를 잘 못 만든 거 아니냐" 등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실제 대형화물선은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작은 배들이 바람이 일으킨 파도에 출렁거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선박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뱃머리가 움직이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같은 성질을 향풍성이라고 부릅니다.
선박이 크면 클수록 바람을 맞는 배의 옆면이 넓어지고, 바람의 영향도 더 많이 받습니다. 선박이 받는 바람의 힘을 계산하는 '풍압력 계산식'이 있을 정도입니다. 바람이 불면 선박이 실제 나아가는 방향과 뱃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산, 건물 등 장애물이 많은 육지와 다릅니다. 바람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사막 한가운데 있습니다. 사막에 부는 돌풍을 막아줄 장애물이 없습니다. 바다와 같은 조건입니다. 선박 갑판 위로 컨테이너를 10층까지 쌓는 컨테이너 선박은 바람에 취약한 선박 중 하나입니다. 길이마저 400m에 달하면서 바람을 맞는 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바람의 영향도 더 크게 받는 겁니다.
컨테이너 선박의 대형화 경쟁은 글로벌 1위 컨테이너선사인 머스크가 2011년 1만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를 의미합니다. 이후 글로벌 선사들은 2만TEU급 컨테이너선을 경쟁적으로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막아버렸던 에버기븐호가 2만124TEU입니다.
선박은 대형화됐지만 항만 등 관련 인프라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2만TEU 컨테이선이 접안 가능한 항구가 몇 군데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부산신항에만 2만TEU 컨테이너선이 접안할 수 있습니다. 수에즈 운하도 대형화에 따른 준비가 부족했던 겁니다.
해기사 출신의 성결대 한종길 동아시아물류학부 교수(부총장)는 "컨테이너선이 대형화됨에 따라 수에즈 운하 도선사들도 시뮬레이션 교육 등을 통해 2만TEU 컨테이너선의 조선을 연습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교수는 수에즈 운하 확장 공사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2015년 수에즈 운하 확장 공사가 완료돼 선박의 양방향 통과가 가능해졌다"면서도 "에버기븐호 사고가 난 부분은 암석이 많은 탓에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집트 자체적으로 할 수 없는 공사라면 세계해사기구 등에 요구해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전했습니다.
결국 이번 사고는 선박 대형화에 따른 후속 조치가 미흡했던 수에즈 운하의 구조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는 진단입니다.
해운 분야 전문가인 윤민현 박사는 한국해운신문에 기고한 '수에즈 운하 사태와 그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해운계는 그동안 규모의 경제론을 이유로 지난 10여년 동안 대형화에 주력해온 결과 선박의 크기는 10년전 대비 배로 커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기술적 물리적 인프라 구축에는 소홀히 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해운계나 보험업계 그리고 당국은 이번 사태의 교훈을 귀담아 새겨두어야 한다"며 "초 대형선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 규모 역시 초 대형급이 될 수 있다는 경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고 초기 에버기븐호의 결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에버기븐호가 일본 이마바리 조선소에서 건조된 사실이 부각되면서 일본의 기술력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식의 논의가 주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윤민현 박사의 지적처럼 선박 대형화에 따른 기술적 물리적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동일한 사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에버기븐호에 결함이 존재했다는 지적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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