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길 위의 무법자' 지하철 환기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7.14 18:00

수정 2021.07.14 18:07

경보 수준 미세먼지 배출
걷기 불편하고 미관 해쳐
'어둠의 굴뚝' 왜 방치하나
[노주석 칼럼] '길 위의 무법자' 지하철 환기구
서울 약수동 사거리는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번잡한 더블역세권이다. 약수역 6번출구에서 큰길을 건너가려면 교통섬을 지나야 하는데 2개의 돌출형 지하철 환기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도 자전거도 무릎 높이의 환기구를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이게 없으면 얼마나 안전하고 쾌적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하철 5호선과 6호선 환승역인 청구역 앞은 더 심하다.
대한조산협회 회관 건너편 시장 앞엔 사람 가슴 높이 원통형 환기구 3개가 보도의 절반을 차지하는 바람에 10여m의 보도가 끊기다시피 했다. 환기구와 인파를 피해 곡예보행을 하는 형편이다.

서울에만 2800여개의 각종 공공 환기구가 있고, 수도권에는 600여개의 지하철 흡기 및 배기용 환기구가 설치돼 있다. 전국 지하철역사와 터널용 환기구도 3800여개나 된다. 비슷한 사례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서울시는 2015년에 48쪽짜리 '공공시설 환기구 설치 및 관리기준'을 만들었는데 하나마나한 소리 일색이다. 그 이전에 설치된 기준미달 환기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길 위의 무법자' 환기구의 결정적 문제는 미세먼지 배출이다. 서울시내 1~8호선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 등에 따르면 터널 319곳과 지하역사 배기용 환기구 대부분엔 미세먼지 여과필터가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 연간 경유차 48만대가 내뿜는 미세먼지 481t 분량이 전국 보행자의 콧속을 마구 파고든다.

지하철 환기구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농도는 상상 이상이다. 지난 2019년 10월 21일 KBS 보도에 따르면 환기구의 평균 미세먼지 농도는 290㎍/㎥였다. 미세먼지 '매우 나쁨' 기준인 150㎍/㎥보다 2배 가까이 높다. 경보발령 수준이다. 특히 열차가 지날 때는 최대 984㎍까지 농도가 치솟는다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지하철 승강장에 스크린도어를 설치, 지하 미세먼지의 1차 습격은 겨우 막았지만 환기구를 통해 지상으로 흘러나오는 미세먼지에는 무방비 상태다. 마스크가 아니라 아예 방독면을 쓰고 다녀야 하나.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속 인물처럼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제 그만 보도에서 나가주세요"라는 광고판이 대문짝만 하게 붙은 서울 시내버스가 거리를 지나다닌다. 전동킥보드, 오토바이, 자전거 같은 개인형 이동수단은 보도에서 내려가라는 내용이다. 서울시가 시행 중인 보행안전문화 캠페인이다.

도시의 만보객 입장에서는 환영이다. 이참에 지하철 환기구도 보도에서 나가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개인형 이동수단이 보행자를 방해하는 일반 잡범이라면 지하철 환기구는 보행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테러범이다. 보행방해는 물론 도시미관상 흉물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지하철 환기구는 지하에 쌓인 미세먼지를 거리로 내뿜거나, 도로 바닥에 가라앉은 초미세먼지를 지하로 빨아들이는 '어둠의 굴뚝'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애꿎은 킥보드나 자전거를 보도에서 내쫓기 전에 정작 해야 할 일부터 하기 바란다. 보행환경을 선진국형으로 만들려거든 먼저 후진국형 지하철 환기구부터 손보란 말이다.
보도에서 지하철 환기구 몰아내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모양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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