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어떤 행위가 객관적·일반적 관점에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면, 실제로 상대방이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느꼈는지에 상관없이 스토킹 행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또 피해자의 불안감은 누적·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도 했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0일 밝혔다.
A씨는 피해자 B씨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뒀는데 2017년 가정폭력 등으로 이혼했다. 이후 혼자서 자녀들을 양육해 오던 B씨는 2021년 3월 A씨로부터 성범죄를 당한 뒤 자신과 자녀들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을 신청했다.
그럼에도 A씨는 2022년 10월부터 약 한 달 간 6차례에 걸쳐 B씨 집에 찾아가 B씨와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거나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는 등의 방법으로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행동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은 스토킹범죄 성립 요건이 불안감·공포심을 실제로 일으켰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하는 '침해범'이냐, 그런 위험의 야기만으로도 성립되는 '위험범'이냐가 쟁점이었다. 침해법은 보호법익이 현실적으로 침해될 것을 요구하는 범죄로 살인이나 상해 등이 이에 속한다. 위험범은 보호법익에 대한 위험의 야기만으로 성립되는 범죄다. 협박이나 업무방해 등이 있다.
1심은 A씨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1년에 40시간 스토킹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A씨는 자신의 행위가 실제로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켰다고 볼 수 없다며 항소했지만 2심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은 검사 공소장 일부 변경에 따라 원심 판결을 파기했지만, A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10개월과 4시간의 스토킹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스토킹처벌법에 따르면 스토킹행위는 침해범이 아닌 위험범으로, 이 사건에서 A씨 행위는 B씨로 하여금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행위라는 것이 2심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A씨의 일부 행위가 실제로 불안감·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행위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하면서도, 위험범이라는 2심 논리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스토킹범죄는 행위자의 어떠한 행위를 매개로 이를 인식한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킴으로써 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의 자유 및 생활형성의 자유와 평온이 침해되는 것을 막고 이를 보호법익으로 하는 위험범이라 볼 수 있다"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도라고 평가될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상대방이 불안감 내지 공포심을 갖게됐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스토킹행위’에 해당하고, 이와 같은 일련의 스토킹행위가 지속되거나 반복되면 ‘스토킹범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에서도 1개월 정도 기간 동안 A씨가 비교적 경미한 개별 행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스토킹 범행이라고 인정한 행위까지 나아간 점을 볼 때, 불안감·공포심이 비약적으로 증폭될 가능성이 충분해 전체를 스토킹 범죄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또 그 정도를 판단할 기준으로 행위자와 상대방의 관계·지위·성향,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행위 태양, 행위자와 상대방의 언동, 주변의 상황 등 행위 전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해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스토킹 행위의 속성 상 비교적 경미한 수준의 개별 행위더라도 누적적·포괄적으로 평가해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면 일련의 스토킹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 최초의 사안"이라며 "위험범에 관한 선례에 따르면 스토킹범죄 피해자를 보다 두텁게 보호할 수 있게 한 판결"이라고 전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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