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클래식계의 조성진·임윤찬처럼 조승우가 연극계 부흥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지난 10월 29일 객석 1000여석을 가득 채운 관객이 숨을 죽인 채 그의 연기를 지켜봤다. 이례적으로 인터미션과 커튼콜 두차례에 걸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이제 ‘햄릿’ 역에 도전하는 모든 배우는 조승우를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당분간 그의 ‘햄릿’을 능가할 ‘햄릿’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연극계 인기 연출가 신유청과 만난 조승우의 ‘햄릿’은 놀랍게도 고전의 위대함과 연극 배우의 가치 그리고 연극의 동시대성을 오로지 '연기'로 증명해낸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로 박제돼있던 셰익스피어 고전은 조승우에 의해 오늘 현재 가장 흥미로운 콘텐츠 중 하나로 거듭난다. 그는 420여 년 전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 속 햄릿을 이 세상으로 생생히 소환해낸다.
햄릿은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아버지를 독살하고 모친과 결혼한 숙부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난제를 부여받는다. 행동에 앞서 끊임없이 사색하는 햄릿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실행하기까지 마음의 감옥에서 깊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또 고뇌한다. 그런 햄릿의 온갖 감정이 조승우의 남다른 발성과 호흡, 완급조절 연기로 객석에 온전히 전달된다. 첫 대사를 내뱉는 순간부터 햄릿이 혼자 혹은 함께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관객을 무대로 집중시킨다. 햄릿의 모든 독백 신은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다.
조승우의 연기력이야 이미 스크린·브라운관을 넘어 뮤지컬 무대에서도 입증됐다. 그런데도 새삼 놀란다. 오직 배우의 몸과 목소리로 승부하는 연극이야말로 조승우라는 배우의 진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라는 걸 일깨워줘서다.
연극 ‘햄릿’은 극중극을 통해 연극의 가치도 되새긴다. 햄릿은 숙부가 선왕을 독살했다는 심증을 확인받기 위해 연극을 올린다. 이때 그는 “우리 연극을 한번 거울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있는 그대로 모습을 정직하게 비춰내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기 전 절친인 호레이쇼에게 “거친 세상에 살아남아 고통스러운 숨결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악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오필리아와의 달콤한 사랑조차 포기한 채 ‘어긋나 버린 시대의 관절을 바로 잡는, 그 저주의 운명’을 끝까지 수행해 내는 한 인간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그 명대사는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그것이 내게 던져진 질문이다”로 재해석된다.
"같은 시대에 살아서 행운"이라는 할리우드 식 찬사가 저절로 나오게 하는, 조승우의 뛰어난 연기 덕에 왠지 따분하게 느껴졌던 ‘햄릿’은 오늘날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객석에선 조승우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웃음이 터졌다가 중간 중간 숨죽이며 훌쩍이는 소리도 자주 들린다. “미친 조승우 연기” “장장 3시간 공연인데 엄청난 몰입감” “햄릿을 보고 울어본 적이 있던가” 등 관람평은 이러한 열기를 엿보게 한다.
2004년 한 통계에 따르면 1601년에 초연된 연극 '햄릿'은 매일 밤 지구상 800여개 도시에서 공연됐다. 강태경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며 "'햄릿'은 한 청년의 해방일지”라며 “세상이라는 감옥뿐 아니라 내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햄릿’은 오늘밤에도 무대에 오를 것”이라며 "빅토르 위고의 말을 빌자면 ('햄릿'의 무대가 끊임없이 무대화되는 이유는) '햄릿'이 무대 위에 빚어놓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연극의 단점이라면 조승우와 다른 배우들의 미세한 연기 간극으로, 장면 별 몰입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올해 연극계 최고 화제작이라는데 이견을 달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승우의 다른 연극이 공연되길 바라본다. 17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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