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성장이 글로벌 국가 패권 싸움으로 확장되면서 'AI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기본법) 제정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내 처리가 유력했던 AI기본법은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돌발 상황으로 뒷전으로 밀린 상태다. 업계와 학계 전문가들은 "AI 산업 생태계가 법적, 제도적 뒷받침 없이 방치된다면 우리나라는 치명적인 도태를 경험할 수 있다"면서 "경쟁국가에 AI 기술이 뒤처지지 않으려면 정치권이 합심해 시급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3위권이라더니…"韓 AI 수준은 2군"
15일 업계에 따르면 AI기본법은 지난 11월 2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한 이후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달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었으나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에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이 추세로는 연내 통과가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AI 기본법은 국가 AI기술이 추구해야 할 방향과 윤리 및 신뢰 규제, 위험성 규제 방안과 국가 지원 방안을 담는 기본 틀이다. 총 19건의 발의법안을 통합 조정해 탄생한 AI기본법은 국가AI위원회 등 각종 AI 조직에 대한 설립 근거, AI 연구개발(R&D)과 인력 양성 예산, 워터마크 표시제, 고영향 AI 규율 및 AI 영향평가 조항 등을 골자로 한다. 정부는 연내 AI기본법을 통과시켜 후속법과 시행령 등을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기술과 산업 생태계 나설 예정이었다.
규제 방향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AI스타트업들의 고민이 가장 크다. 한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AI기본법이 어떻게 정해질지 4년을 지켜봤는데 올해도 정해지지 않는다면 혼란이 상당할 것"이라며 "기술 개발이나 서비스를 출시한 기업으로서는 장기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AI기술은 기업 단위가 아닌 국가 차원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미 '국가AI안보각서'를 통해 국가 차원에서 인재확보 기준을 만드는 등 AI기술 무기화에 나서는 상황이다. 유럽연합(EU)은 AI법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AI 구축을 목표로 규제 체계를 정비 중이다. 중국은 정부 주도의 대규모 데이터 및 기술 인프라 지원을 통해 AI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AI 기술 성숙도와 잠재력이 전 세계를 기준으로 '2군'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전 세계 73개국을 분석한 'AI 성숙도 매트릭스' 보고서에 따르면 AI 선도국은 미국, 중국, 영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 5개국 뿐이다. 한국은 호주,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일본 등과 함께 2군에 해당하는 'AI 경쟁국'에 포함됐다. 2군 중에서도 비교적 상위인 '안정적 AI 경쟁국'으로 분류됐지만, 그간 3위권이라던 정부 진단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정부는 영국 토터스미디어가 발표한 '글로벌 AI 순위'를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싱가포르, 영국 등과 함께 세계 3위권이라고 밝혀왔다.
"AI는 미래 국가패권…실기하면 돌이킬 수 없어"
학계 역시 AI기본법 제정 지연에 대해 "실기하면 국가 존립도 위험해진다"며 상당한 우려를 표시했다. 특히 미국 등과의 기술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선도적 인프라 투자 기반이 다시 흔들린 것은 단순히 산업 문제를 넘어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명수 AI 안전연구소 소장(서울여대 교수)은 "AI는 자본과 인력의 싸움이다. 챗GPT를 만든 오픈AI 한 곳의 자본 규모와 우리나라 전체 AI 산업을 비교해도 우리가 적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경쟁해야 하는데 국가 지원 근거와 규제 방향을 설정하는 AI기본법 없이 기업이 각자 도생하려면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는 "지금 AI는 국가 패권과 연결되어 있어 한번 밀리면 국가 패권 경쟁에서 밀리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법 제정이) 머뭇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냐"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조 단위 투자를 퍼붓는 미국 등과 같이 한국도 공공과 민간에서 각각 10조 수준의 투자가 이뤄지고 실제 서비스가 적용됐을 때 현실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가야한다. (AI 발전의 주요 기점이 될) 내년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글로벌 AI 순위에서) 우리가 6~7위라고 하던데, 사실 의미가 없다. 말이 6~7위지 미국의 반의 반도 안되는 수준 아니냐. 만약 기술 패권을 쥔 미국이 (AI 부문에서) 관세를 크게 올려버리면 어쩔꺼냐. 그런 상황을 맞지 않기 위해 기술 개발을 독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 최경진 가천대 법대 교수도 "선진국일수록 정치가 혼란스럽더라도 기본적으로 경제를 떠받치는 시스템 자체는 안정화되어 있다"면서 "정치적 혼란은 논외로 하고, 이제는 여야가 주요 민생과 산업 이슈를 먼저 챙겨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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