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12.25 18:09

수정 2024.12.25 18:09

안승현 전국부장
안승현 전국부장
박근혜 정부 시절 교육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은 '국정교과서'였다. 결론적으로 교사들의 압도적인 반대와 역사관의 편향성에 대한 국민적 저항 때문에 이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세대, 지역 갈등이 초래되면서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국론분열에 시달려야 했다.

교육정책이란 게 이렇게 참 묘하다. 국민적 관심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높기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절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취지와 상관없이 시행 시기를 잘못 잡으면 더 큰 혼란까지 초래한다. 19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이 그랬고 1990년대 말 자립형 사립고 도입도 그랬다. 올해와 내년에는 의대정원 2000명 증원 문제가 이미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다.

정책 입안자들은 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말하지만 정작 그 미래를 살아갈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의대생들이 집단휴학계를 냈다.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냈다. 이들이 내건 명분은 '의료교육 정상화'다.

정부가 내년부터 의대정원을 늘리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의대정원이 늘면 교수 수도 늘어나고 실습병원도 늘어날 텐데 왜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걸까. 사실 이들의 진짜 걱정은 다른 데 있다는 걸 국민들은 다 안다. 의대정원이 늘면 의사 수가 늘고, 의사 수가 늘면 소득이 줄어들 것이란 불안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부정할 방법이 없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의 소득을 올린다. 그런데도 의사 수를 늘리는 데 저항하는 건, 마치 1980년대 강남 8학군 학부모들이 다른 지역 학교들의 교육여건이 좋아지는 걸 반대하던 것과 비슷하다. 내 아이만 좋은 학교 다니면 되고, 내가 속한 직업군의 기득권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정부도 잘못이 크다.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은 10년 전부터 논의됐어야 할 사안이다. 의료인력 양성에는 최소 10년이 걸린다. 2036년부터 의사가 부족해질 것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면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증원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2000명을 한꺼번에 늘리겠다고 하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고 지금 현재 큰 문제는 시기다. 수시모집 최종 합격자 등록이 끝난 상황에서 아직도 2025학년도 의대정원을 줄이자는 얘기가 나온다. 이미 수시에서 뽑은 학생들은 어쩌자는 건가. 이들의 합격을 무효로 하자는 건가, 아니면 정시모집 인원을 그만큼 줄이자는 건가. 어느 쪽이든 법적 분쟁은 불 보듯 뻔하다.

의료계도 이제는 현실적인 출구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2025학년도 정원은 그대로 두고 2026학년도부터 조정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떤 정책이든 한번 시행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고교평준화나 자사고 폐지가 대표적 사례다. 이런 걸 보면서 의대생들이 불안해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의료계가 지금처럼 강경 일변도로 나가다간 자칫 국민적 반감만 키울 수 있다. 이미 수시모집은 끝났고, 정시모집을 앞두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의대정원 문제의 본질은 결국 '시기'와 '속도'다. 언제부터 얼마나 늘릴 것인가가 관건이지, 늘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2026학년도 증원 폭을 조정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의료계도 이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그래야 전공의들도 돌아오고 의대생들도 강의실로 복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대화다.
정부는 의료계의 우려를 귀담아들어야 하고, 의료계는 국민건강이란 공공재의 관리자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교육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의료 서비스의 질은 높이는, 그런 해법을 함께 찾아야 할 때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이제 그만 끝내야 할 때다.

ahnma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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