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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하고 찢어서 엮는다… 평면성 파괴한 추상화 [Weekend 문화]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2.07 04:00

수정 2025.02.07 04:00

신성희 개인전 '꾸띠아주, 누아주'
내달 16일까지 종로 갤러리현대서
'공간별곡' 등 주요 작품 32점 선봬
캔버스 잘라낸 색띠 그물처럼 묶어
평면→입체로 확장한 독창적 기법
3부작 초기 회화 '공심'도 첫 공개
신성희 작가 작업 모습.
신성희 작가 작업 모습.
신성희 작가의 작품 '회화로부터'(오른쪽)와 '공간별곡'.
신성희 작가의 작품 '회화로부터'(오른쪽)와 '공간별곡'.
신성희 3부작 회화 '공심(空心)' 갤러리현대 제공
신성희 3부작 회화 '공심(空心)' 갤러리현대 제공

색점과 색선, 얼룩 등으로 추상회화를 그린 뒤 캔버스를 뒤집어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긋고 가위로 잘라낸다. 잘린 색띠를 틀이나 지지체에 묶어 그물망을 만들면 '누아주' 회화(엮음 회화)가 완성된다. 색칠한 캔버스를 일정한 폭으로 재단하고 바느질이나 재봉틀로 박음질해 솔기가 드러나게 이으면 '꾸띠아주' 회화(박음 회화)로 탄생한다.

붓이 흩뿌린 물감이 스며든 조각들의 움직임이 끝없이 퍼져나가는 듯한 신성희 작가(1948~2009)의 '꾸띠아주, 누아주' 회화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다음달 1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신 작가의 작업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누아주' 시리즈를 중심으로 10년 주기로 작업 세계에 큰 변화가 있었던 그의 40여년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2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의 '꾸띠아주'와 '누아주'는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입체로 확장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단어다. 프랑스어인 '꾸띠아주'는 채색한 캔버스를 일정한 크기의 띠로 재단하고 박음질로 이은 기법을, '맺기'와 '잇기'의 '누아주'는 캔버스 색띠를 엮거나 묶는 기법을 뜻한다.

전시는 마대 회화를 제외한 콜라주 시리즈와 꾸띠아주, 누아주 시리즈를 모았다. 1층에서는 프랑스 파리와 한국에 오가며 서울 성북구 작업실에 머물던 시기 누아주 시리즈가 놓였다.

전시장 가운데 놓인 '회화로부터(2009)'는 맨 위에 놓인 붓에서 캔버스에서 잘라낸 색띠가 그물처럼 이어지는 작업으로, 평면 붓질에서 시작해 평면성을 넘어 입체와 평면이 하나가 됐던 그의 작업 세계를 함축한 듯하다.

특히 '회화로부터'는 '누아주' 시리즈의 비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 작가의 붓에서 색띠가 쏟아져 내리는데, 중간 중간에 그의 회화에 봉사했던 닳아 빠진 붓들이 유연한 색띠 천과 어우러져 비정형적인 오브제로 좌대 위에 안착해 스치는 바람에 시나브로 떨리는 모양새다. 그는 로툰다 형태의 5층 높이의 계단 공간에 비슷한 형식의 혁신적인 회화 설치를 구상하며 이 작업을 제작하게 됐는데, 실현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 '회화로부터'는 이번 개인전 주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작인 셈이다.

지하 전시장은 '콜라주' 시리즈와 '꾸띠아주' 시리즈로 구성됐다. '꾸띠아주' 시리즈 중 '연속성의 마무리'는 앞뒷면을 모두 볼 수 있게 천장에 매달린 채로 걸렸다. 태양빛을 담은 2점의 추상 회화를 정밀하게 5㎝ 폭으로 잘라낸 후 다시 재봉틀로 박음질해 뒷면에 천의 솔기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입체 회화를 완성했다. 이례적으로 작품을 천장에 걸어 뒷면을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특히 지하 전시장에 내걸린 그의 초기작인 3부작 회화 '공심(空心)'(1971)은 갤러리 전시에서 첫 공개됐다. 신 작가가 23세에 완성한 이 작품은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 준 작업이다. 초현실주의 화풍의 내러티브가 담긴 그림은 평평한 화면을 넘어서 회화의 비전을 선구적으로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층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된 누아주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추상화가 그려진 캔버스에 정교하게 칼집을 내고 다른 평면 추상화에서 잘라낸 색띠를 엮은 '평면의 진동' 연작과 공간감이 두드러지는 '공간별곡' 연작, 꼬리가 긴 색띠들이 촘촘하게 매듭지어진 '결합' 연작 등이다.

"허상의 그림이 아닌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 회화의 옷을 입고 빛 앞에 서자. 작가 신성희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나라의 존재자가 되게 했다."

생전에 작성한 작가 노트 '평면의 문: 캔버스의 증언(2005)'처럼 그의 작품들이 상상이 아닌 조각이라는 실체 위에 화려한 색채로 입혀져 영원히 남겨져 있었다.

한편, 신 작가는 1948년 경기도 안산에서 출생해 홍익대 회화과에서 수학했다. 1968년 '신인예술상전'에서 신인예술상 등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0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30여년간 작품 활동에 나섰다. 이후 파리, 취리히,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주요 갤러리와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유네스코 본부, 프랑스 현대미술 수장고(FNAC),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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