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춘원 이광수의 국토기행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2.24 10:45

수정 2025.02.24 17:35

춘원 이광수(1892~1950)
춘원 이광수(1892~1950)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1892~1950)는 국토를 기행하면서 국가의 미래 발전을 위한 많은 생각과 의견을 기행문으로 기록한다. 춘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꼽혔다. 전래로 조선의 선비들과 학자, 관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와 국토를 기행하면서 기행문과 감상문 등을 많이 남기고 있다. 춘원을 사례로 기행록을 살펴본다.

그의 대표적인 기행록은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1922),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 1913~1919), '남유잡감'(南遊雜感, 1913~1931) 등이 있다.

금강산유기는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과 금강산을 기록한 것이다. 오도답파여행은 한국의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 5도를 둘러본 여행기이고, 남유잡감은 일본, 중국, 연해주 등 해외여행기다. 오도답파여행은 1917년 6월 ‘매일신보’에 연재한 글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다음해에 다시 정리해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는 ‘청춘’ 잡지에 매호 실었다. 여기서 춘원은 각 지역의 모습을 간단히 설명하고 지역의 발전을 위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미래의 기대하는 상상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기행문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가능하면 춘원 특유의 말투를 그대로 살리고자 한다. 오도답파여행의 일부를 살펴본다.

1920년대 전북 군산 일본인촌. 서문당 제공
1920년대 전북 군산 일본인촌. 서문당 제공

1913년 6월 26일 서울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조치원역에 내려 자동차로 공주로 달아난다. 도로가 좋다. 질풍같이 달려도 요동이 없다.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는 거의 ‘빨간산’ 뿐이다. 그리고 바싹 마른 개천,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을 보면 비관이 생긴다. 금강(錦江)은 3~4년 전만 하더라도 공주, 부강까지 선박이 통행하였다 하나, 점차 수량이 감소하여 지금은 소선박도 운행이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원래가 아닌 주민들의 부족함 때문이라 본다. 자각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다. 충남도청을 들러 식림 대책을 물으니 ‘25년 예정으로 충남에 식목을 하고 벌채를 금지하며 각 군면에서 묘목을 기르도록 할 예정으로 대전, 연기, 천안 등 철도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실행할 것’이라 하니 그런대로 안심을 가진다. 산업에 대해서도 들어본다. 본도는 역시 농업이 주산업이다. 관계설비와 종자개량에 적극 노력하여 경지면적과 수확고가 증가하여 간다. 또한 잠업과 저포업(苧布業, 모시옷 제조)을 적극 장려한다. 본도는 기후와 토질은 잠업에 적당하므로 10년 계획으로 뽕나무를 심을 것이라 한다. 유해무익했던 금강의 수리를 응용하여 공주에 대규모 제사공장을 세우고 부를 증진하여 철도로 발전한 대전, 논산, 조치원에 빼앗긴 공주에 신생명을 부여하려 한다. 공주라고 부름은 시가지를 두룬 산들이 공자형(公字形)을 띄는 까닭이라 한다. 다음날 공주산성을 오른다. 금강의 남안에 돌출한 고지상에 있는 성으로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울창한 송림의 산길을 걸어서 과거 승병의 총본산인 영은사(靈隱寺)를 들린다. 법당문을 반쯤 잘라내고 유리창을 단 것과 계하(階下)에 석유 광명등을 켠 것이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으로 보인다. 진남문을 통해 공산성에서 나왔다.

버들 그늘에 모옥(茅屋, 띠집)으로 된 주점이 있어 막걸리를 메기 안주로 한잔을 마셨다. 여주인에게 물은 즉, 여기 지명은 왕자터요, 부여서 20리라 한다. 문앞에 청강(靑江)이 있어 메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부여군 현내면 가증리(佳增里)에 유명한 유사이전(有史以前)의 묘지가 있다. 일본인 전문가 감정으로는 4천년 전이라 한다. 백제의 서울이 어떠한 것이론고 하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부소산 동편 모퉁이를 돌아 초갓집 20~30여채가 적적이 누워있는 부여 읍내에 도달했다. ‘이것이 부여런가’ 사비(泗沘) 서울이라 누가 믿으리오. 부소산 동쪽 영월대 넘어 있는 창고터를 보았다. 아직도 쌀과 밀과 콩이 까맣게 탄화하여서 남아있다. 백마강 물소리 들리는 절벽 밑 반석 위에 있는 것이 유명한 고란사(皐蘭寺)이다. 아마도 불법을 존중한 백제왕실의 수호사일 것이다. 연화를 아로새긴 주춧돌이며 빤빤히 닳아진 섬돌에는 당시의 귀인의 발자욱이 있을 것이다. 낙화암상에서 방혼(芳魂)이 스러진 궁녀들도 아마도 이 법당에서 최후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우리 배는 규암진(窺岩津)을 떠났다. 옛날 백제의 상선과 병함이 떠났던 데요, 당·일본·안남의 상선이 각색(各色) 물자를 만재하고 복진하던 데다. 자온대(自溫臺)의 기암은 의자왕이 일유(逸遊)하던 명성이 전하지만, 당시에는 이별암(離別岩·삼천궁녀 바위)으로 유명했을 것이다.

조선의 제일의 평야요, 제일의 미(米) 산지인 전북평야에 들어섰다. 일망무제다. 평야 중에는 조산(造山)같은 조그마한 산들이 있고, 산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밑에 촌락이 있다. 마치 바위에 의지하여 굴이 붙어 있는 것 같다. 들에 나가 먹고 산에 들어와 자는 것이 이 지방의 특색이다. 그러나 어떤 촌락은 그만한 산도 얻지 못하여 광야에 길 잃은 자 모양으로 벌판에 있는 자도 있다. 퍽 산이 귀하다. 이 평야는 고래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겸수(兼修)하므로 농민의 생활이 극히 불안정하였다. 만일 수리(水利)가 정리되면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넉넉히 3할 이상의 증수(增收)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산에 도착하였다. 군산은 전북 유일의 개항장이요, 조선 제일의 곡물 수출항이다. 가구의 정연함과 가옥의 정제함이 꽤 미관이다. 이리역(裡里驛)에 하차하여 경철로 전주로 항하였다. 이름은 경철이라하지만 차창도 훌륭하고 속도도 어지간히 빠르다. 전주의 수려한 봉만(峰巒)이 가까워진다. 산은 참으로 수려하다. 전주의 특색은 산이라 하였다. 대장촌, 삼례 등지의 농장이며 송림이 울창한 건북산릉의 승경은 귀로에 찾기로 했다. 전주는 백제시절에 완산 혹은 비사벌이라 하였다 하며, 견훤의 후백제의 왕도라 한다. 전주 금융기관으로는 금융조합이 있으나 중농 이상 이용이 가능하여 뒤에 소농도 가능한 전주농사조합을 시험적으로 설립하였다. 전주에 제지공업을 기계공업적으로 가능하도록 시험중이라 한다. 전주는 죽기, 목기, 지류, 선자(扇子) 등은 전부터 유명하였다. 당국의 장려로 더욱 발전하였다. 이를 위해 전주공립간이공업학교 생도들의 죽기와 목기, 장수의 석기, 운봉의 목기는 세계 어느 시장에 내어도 부끄럽지 아니한 것이다.

1920년대 전주 시내 모습. 서문당 제공
1920년대 전주 시내 모습. 서문당 제공

이상의 춘원답사기는 ‘오도답파’의 충남과 전북의 일부를 담은 것이다. 본 글은 1963년에 나온 이광수전집 18권에서 인용했다. 그의 전집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집으로 소설, 시, 수필, 기행문, 서간문 등 다양한 글들의 모음이다. 편집위원으로는 주요한, 박종화, 백철, 정비석, 박계주 등 당대 한국 최고의 문학인들이다. 이 전집에서 춘원은 우리 한글과 어려운 한자, 당시의 일본식 한자, 일본어, 영어 등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춘원의 대단한 문학 수행의 결과일 것이다. 후대에 춘원의 의식과 사상에 대한 비판론도 많이 나왔지만, 당시 근현대 교육이 매우 부족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많은 지리정보와 함께 개인적 삶의 개선과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춘원의 친일론으로 전국 50곳이 넘는 문학관이 있지만 이광수문학관은 없다. 다만 인천의 한국근대문학관의 11인의 문학인에 춘원이 들어 있다. 춘원이 북한 평북 정주 태생이고 자강도 강계에서 별세한 영향도 있는 것일까? 아무튼 춘원의 기행문은 문학적인 표현과 함께 당대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미래 의견을 함께 보여준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실시간핫클릭 이슈

많이 본 뉴스

한 컷 뉴스

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