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파이낸셜뉴스
2014.07.13 16:37
수정 : 2014.10.25 06:50기사원문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14/07/13/201407131636505075_l.jpg)
독일통일을 '흡수통일'로 규정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동독 주민에 대한 모욕이다. 통일의 주체를 서독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체커 통일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 엘리트들은 통일의 주체를 동독 시민으로 보고 있다.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을 '발에 의한 결정'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탈출자들은 희망이 없는 동독 정권을 버리고 자유와 풍요의 땅 서독으로 떠났다. 반면 상당수의 주민은 '우리는 이곳에 머물겠다'라고 외치면서 거리로 나가 개혁을 요구했다. 이 대규모 시위가 바로 '월요데모'다. 이것은 시민들이 독재정권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자유혁명이었으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혁명이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성공적인 시민혁명이었다. 월요데모는 어떻게 시작됐고 평화혁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월요데모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됐다. 이 교회 퓌러 목사에 따르면 월요데모의 기원은 1981년에 시작한 '평화를 위한 10일 기도회'였다. 이것이 1982년부터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월요일마다 열렸다. 당시 유럽에서는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와 이에 대응해 나토가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평화운동 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1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기도회 참석자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 1시간여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권으로서도 '반핵 평화 시위'를 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로 기도회와 시위는 계속됐고 1989년 5월 대규모 탈출사태와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대규모 시민혁명이 어떻게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첫째, 주도 단체들과 참가자들 모두 '비폭력'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퓌러 목사는 시위자들에게 '경찰에게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또한 촛불 시위자들이 모두 촛불을 두 손으로 들어야 했기 때문에 손에 몽둥이나 돌을 들 수 없었다고 한다. 둘째, 시위자들의 숫자가 수만명에 이르자 경찰이 무력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르바초프가 소련군의 시위 개입과 무력 사용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호네커 서기장은 무력진압을 요청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반대했다.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구호가 월요데모에 등장했다. 독재정권의 핍박을 당하던 동독 시민들이 '우리가 주인이다'라고 외치고 나온 것이었다.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베를린 봉기 등 끔찍한 폭력으로 점철된 독일 땅에서 동독 시민들이 무혈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평화 통일을 이룩한 역사가 부럽다.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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