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없는 뒤틀린 사회

      2015.06.17 16:59   수정 : 2015.06.17 16:59기사원문
사태 수습만 어렵게 할 뿐.. '메르스 전사'에 편견·박대


에볼라는 우리 사회에 몰아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보다 전염성이 강하고 훨씬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지금까지 2만7000여명이 감염돼 1만1000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지난해 2월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가 10월 마침내 미국에 침투했다. 미국은 집단공포에 휩싸였다.

시에라리온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의료진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쏟아졌다.
뉴저지 등 일부 주가 에볼라 창궐국가 여행객을 21일간 의무격리토록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맞섰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우리를 에볼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며 "의료진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에볼라에 감염됐다가 완치된 간호사를 백악관에 초청해 포옹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또 "그들(에볼라 의료진)은 '신의 일(God's Work)'을 수행하고 있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희생과 헌신 없이는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바마는 잘 알고 있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4년 '올해의 인물'로 '에볼라 전사들'을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국가적 재난을 만났을 때 '영웅'을 만들곤 한다. 주로 사태 수습의 중심 인물이 영웅이 된다. 사태가 터지면 책임부터 따지고 속죄양을 만들어 내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2001년 9·11사태 때는 목숨을 건 구조에 나선 소방관, 경찰들이 시민 영웅이 됐다. 그해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은 구조작전을 진두지휘한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이었다. '영웅 만들기'는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국론 분열을 막고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 원활한 사태 수습과 문제 해결을 기하는 효과가 크다.

2002~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 중국을 강타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몸으로 사스에 맞서 싸웠다. 감염자 가운데 의료진이 20%나 됐다. 치료 중 감염됐지만 다른 사람에게 옮길까봐 쓸쓸히 죽어간 간호사, 암 치료를 받던 중에도 환자를 돌본 칠순의 군의관 등 안타까운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중국인들은 늦게나마 곳곳에 이들의 기념비·흉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의사인 중난산 중국공정원 원사는 사스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해 '사스 퇴치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메르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우리 의료진이 '에볼라 전사' '사스 전사'와 다를 게 뭐 있는가. 하지만 우리의 '메르스 전사'들은 영웅 대접 받기는커녕 기피와 따돌림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메르스가 발병한 병원 의료진의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귀가 조치까지 받는다고 한다. 의료진과 가족을 아예 감염자로 낙인을 찍기도 한다. 메르스 감염 병원의 의료진은 항의와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치열한 방역전쟁에서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의료진마저 무너지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보건당국의 태만, 무능과 늑장대응, 병원들의 부적절한 감염자 관리 등 전염병 대응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렇다 해서 아무 죄 없는 '메르스 전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외면한다는 것은 시민의식의 수준 문제다. 이래서는 다 같이 힘을 합쳐 사태를 해결하자는 공동체 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대신 불신·불안·공포가 확대재생산되고 반목·이기주의가 독버섯처럼 번지게 된다.


"메르스가 내 환자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맨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다"는 편지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동탄성심병원의 김현아 간호사는 "차가운 시선과 꺼리는 몸짓 대신 힘 주고 서 있는 두 발이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일이 없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당부했다. 지금 우리의 메르스 전사들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영웅을 몰라보는, 아니 영웅을 거부하는 사회는 불신사회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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