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국 수묵추상의 거장 서세옥
2015.11.29 17:52
수정 : 2015.11.29 20:36기사원문
수묵을 결심했던 때를 물으면 유화의 기원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점·선·인간을 그리는 이유를 물으면 그림을 그린 첫 인류가 누군지 아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국 수묵 추상의 거장으로 불리는 산정(山丁) 서세옥(86). 구순을 바라보는 화백의 그림 인생을 두 시간 안에 돌아본다는 것은 이 세상 회화 역사 전반을 알자고 덤비는 것만큼이나 무모했다.
더구나 그가 그리는 것은 무극(無極), '한도 끝도 없음'이다. "내 앞에 여성이 앉아 있잖아요. 그 눈·코·입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 보이는 모습의 '종놈'으로 살기 싫거든.
절대의 힘, 절대의 존재, 절대의 그 무엇도 아닌 공간으로 초월하는 거지. 그러면 오히려 슬픔과 기쁨, 고독과 어울림, 살찐 사람과 메마른 사람, 모든 군상과 현상이 내 손 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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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했다. 1960년 서울대 미대 동문들과 결성한 묵림회도 그랬다. 동양화단의 고루한 시각,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폐단, 왜색 등 기존 화단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모색하고자 청년 화가들이 뭉쳤다. 1950년 대학 졸업 후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고서 이후에도 수차례 수상했던 그가 국전을 부정하고, 주축이 된 만큼 묵림회 창단은 당시 화단에 큰 충격을 몰고왔다. 무극의 길을 걷다 보니 그는 어느새 한국 현대미술사의 독보적인 존재가 돼 있었다. 수묵화로는 풍경화가 전부인 줄 알았던 한국 화단에 그로 인해 수묵 추상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지난 10일 '서세옥'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그는 그러나 '수묵 추상'을 부정했다. "구상과 비구상이라고 하죠. 비구상이 곧 추상이고. 이런 구분이 다 서구에서 만든 기준이에요. 나는 단지 보이는 것 너머의 무한함을 표현했을 뿐이지."
모든 것의 부정이었다. 그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도 부정에서 시작됐다. 문자에 대한 부정이었다. "문학은 언어로 소통을 하죠. 기록을 해서 전달해야 하니 문자가 필요할 수밖에. 문자를 떠나서 문학은 존재할 수 없죠. 이 얼마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속박입니까. 인생은 자유와 해방 속에서 살아가야지…."
원래 문학을 하려 했었다. 집안에 책이 수백권. 책 읽고 글씨 쓰는 게 다섯 살 꼬마의 놀이였다. 10대 때는 당대 최고 문인·화가들의 모임에 자주 불려다녔다. 한국 최초의 미술 유학생이자 한국 유화 1세대인 춘곡(春谷) 고희동, 당대 최고 서화가이자 해방 전부터 국전의 심사위원이었던 근원 김용준, 추사를 잇는 서예의 거장 소전 손재형 선생 등이 다 그 모임에 속해 있었다. '산정'이라는 아호도 이들이 지어줬다.
"내 이름의 옥자가 쇠금 변에 구슬 옥이잖소. 어른들께서 옥과 돌은 명산에서 나는 것이니 뫼 산(山)을 하나 쓰자 하셨죠. 그러니 산과 관계있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산정(山丁). 산같이 높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받는 사람, 산과 예술을 지키는 사람. 여러가지 뜻이 있어요. 복합적이지."
―그림에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였나.
▲대여섯살, 아주 어릴 적부터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요새처럼 유치원이나 학원 같은 게 없을 때라 심심하면 지필묵을 꺼냈다. 그때부터 명필 소리도 들었다. 아주 재미를 느꼈다. 그때부터 화가로 일생을 보낼 운명이었나 보다. 국민학교 때는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교실 정면에 항상 내 그림만 걸렸다.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열여덟살 즈음에 길진섭 선생의 소개로 근원 김용준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일본 도쿄대에서 지금도 '그림의 신'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처음 만난 날 다짜고짜 나에게 묻더라. '자네 환쟁이가 되고싶은 거냐?' 황당해서 아무 대답도 안 하니까 다시 묻더라. '아니면 예술가를 하려는가?' 냉큼, 예술가가 되고싶다고 했다. 그 대답이 내 결심을 촉발시켰다.
길진섭은 당대 최고의 서양화가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이다. 독립운동가와 광복군의 '돈주머니'였던 서세옥의 아버지와 길 목사는 막역한 사이였다. 길진섭의 주선으로 김용준 선생을 만나 "가끔 얘기나 듣는 정도"의 지도를 받았다. "선생께서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중하지만 그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셨지. 그리고 사실 그분 작업실이 두 사람 앉아 있기도 협소했어. 펼쳐놓고 그릴 형편이 안됐지."
그러다 광복을 맞았고 서울대 미술대학 1기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그림 공부가 시작됐다. "눈만 뜨면 그림을 그렸지.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4개 학과가 있었는데 2학년 때까지는 두루 배워야 했어. 그래야 모든 분야의 장단점을 아니까. 그러다 수묵으로 방향을 잡았지."
―왜 수묵이었나.
▲유화가 원래 서양이 아니라 동양에서 시작됐다. 중국 한대 후기에 태동해 당대에 극도로 번성했고 우리나라까지 전해졌다. 신라시대 분황사 황룡사 모든 장식이 유화 기법이다. 그런데 민들레 꽃은 져도 강 건너에 씨가 날아가 번성한다. 유화가 서구의 것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유화를 기를 쓰고 배웠다. 이미 서양에서 유화는 쇠락하던 것이었다. 많은 배움을 구해본 결과 수묵이야말로 시대를 타지 않는,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결론에 닿았다.
수묵을 택한 이유로 그는 '흑과 백의 묘미'도 꼽았다. "검정색과 흰색은 모든 색의 출발점이지. 중국 남경 사람들은 검정색 옷만 입기도 했어. 최고의 색깔이다 이거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색이며, 모든 색을 다 내포하고 있는 색의 할아버지지."
지필묵이라는 재료의 특성상 획의 순서, 호흡 등 그리는 사람의 기량과 정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수묵이다. 같은 재료로 글을 쓰는 문인들이 '인격수양'을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한 획의 필선에도 다채로운 농담(濃淡)과 양감이 살아 움직인다. 그의 브랜드가 된 '사람' 연작은 거인이 뛰쳐 나오는 듯하기도 하고 옹기종기 모인 군상에서는 공동체의 연합, 따뜻함마저도 느껴진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듯한 인간의 형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같은 형상이 없다. "가로 세로 붓을 떨어뜨리니 바람과 우뢰소리 일어난다/홀로 서릿발 같은 붓을 잡고 마귀의 진을 무찔러서 열어가는데/만약에 진짜 용이나 호랑이를 사로잡지 못한다면/어찌 우주의 참 기운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가 쓴 7언 절구의 한시에는 그가 생각하는 모필의 기운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필법이 엿보인다. 어떻게 만들어냈나.
▲한마디로 말해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게 내 일생이었다. 서 선생네는 도깨비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밤중에 수시로 일어나 내가 어디까지 도달했나를 생각했다. 내 붓 끝이 우주의 에너지를 꽉 잡고 내가 잡은 손을 타고 붓으로 흘러내려 낙숫물처럼 떨어지는 게 아니라, 커다란 강물처럼 흘러 내려서 종이에 닿는 순간 와장창 천둥번개가 번쩍 일어났을 때, 미칠 지경으로 꾹 참고 있다가 시원하게 배설하는 느낌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에서 시작해, 선, 인간으로 그림의 소재가 변모해갔다.
▲그림의 출발이 그렇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출발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거대한 원이 된다. 그 안에 또 점을 찍어서 좌우로 나누면 공정하게 둘로 갈라진다. 남자와 여자, 밤과 낮, 삶과 죽음, 모든 것이 탄생한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면 우주가 꽉 차고 불러들이면 다시 점 하나가 된다. 철학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수묵화 중에서도 추상을 그리는 이유는.
▲추상이라기보다 무한대로의 확대다. 우리는 우주 속의 무한한 에너지를 쥐고 살고 있는데 캔버스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내 그림에서의 여백은 자연과의 연결이다. 무한대의 우주공간 속에 내 그림이 놓여 있는 것이다.
서 화백은 한국미술 역시 "한국이라는 땅덩어리 안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자꾸 해외로 나가서 한국이 지구를 덮어야 돼. 한국에서만 해야 한국화가 아니에요. 한국적인 그림은 곧 세계적인 것이지. 한국화가 끝장이다, 우리 미술의 장래는 전통회화에 있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도대체 한국화가 무엇인지 전통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한국화는 무엇이고 전통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을 담은 것이 한국화다. 붓과 먹을 들어야만 한국화가 아니다. 전통이란 상투를 틀고 붓놀음 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지나며 곁가지가 생기고 고목이 돼가는 것이 전통이다. 끝없이 넓은 세계에서 자유스럽게 발전하는 것이다.
서 화백은 오히려 한국미술의 미래가 밝다고 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나라나 흥망성쇠가 있어. 비관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기대해야지. 나 젊을 때처럼 비행기가 없어 못 나가는 것도 아니요, 사상이 막혀 있는 시대도 아니요, 활짝 개방된 세상인데 걱정할 게 무에 있나. 대한민국을 문화강대국이라고 하지 않소. 게다가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작가들이 많아요. 내 아들이라서 민망하지만 서도호가 그런 인물이지." 그의 두 아들인 설치미술가 서도호(53)와 건축가 서을호(51) 모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서도호의 행보는 고 백남준을 뛰어넘을 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가 뭔가 조언하거나 가르친 적은 없어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고 개척하는 거지. 다만 큰 세상에 나가 공부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추천해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야 더 높이 올라설 수 있거든. 좁은 땅일수록 중상모략하고 남이 조금만 올라서면 발로 밟으려고 하게 되지. 내가 경험한 일이기도 해요."
그는 현역 화가다. 종이 위에서 두껍고 커다란 붓을 휘두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서양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 명명하고 찬사를 보낸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더 그려나갈지 궁금했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이 하나가 됐을 때 모든 것은 낙원이다. 이게 내 답이다. 보상 없는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지. 그러다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고 산 사람들은 계속해 나가겠지. 나는 미술의 역사를 엮어내는 한 줄거리로 남겠지."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약력 △86세 △대구 출생 △서울대 제1회화과 졸업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 미술학 명예박사 △전국미술대학장협의회 회장, 서울대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소장,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심사위원회 위원, 목림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회 및 심사위원회 위원 △중앙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 △성북구립미술관 명예관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현) △서울대 미술대학 명예교수(현)
■수상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무총리상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문교부 장관상 △제1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예술원장상·초대작가상 △국민훈장 석류장 △서울시문화상 △제2회 일민예술상 △제13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상 대상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제52회 대한민국예술원상(미술부문) △은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