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남녀노소가 사랑하는 배우 이순재

      2015.12.06 19:44   수정 : 2015.12.06 21:10기사원문


배우 이순재(사진·80)를 인터뷰하러 간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고등학생 사촌부터 회사 동료, 부모님까지. 남녀노소를 아울러 사랑받는 배우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와, 좋겠다' 감탄에 이어 그에 대한 찬사와 함께 따라오는 말이 있었다. '그 연세에 참 대단하셔. 연극 도전도 하시고.' '도전'이라니…. 배우로서 한 우물만 파온 인생에서 연극은 그의 '시작'이었다. 1960년 서울대, 연대, 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단한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멤버로 소극장 운동을 주도하던 그였다.


요즘 세대에게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야동순재',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의 '직진순재'로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56년 서울대 철학과 3학년 때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연극·영화·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300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다. 출연작 가운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주락' 같은 연극들은 그가 특별히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이 시작일 수밖에 없었어요. 텔레비전도 없었고 영화라고 해도 당시 한국 영화는 외화에 비해 수준이 많이 못미쳤으니까 연극에 자연스럽게 눈이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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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배우 이순재는 여전한 현역이다. 아서 밀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연극 '시련'에 댄포스 역을 그가 맡았다. 지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잘못된 판단을 돌이키지 않고 사형선고까지 내려버리는 악역이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역할이다.

하지만 지난 4일 공연 전 극장에서 만난 실제 모습은 소탈하고 편안한 이웃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꽃보다 할배'를 찍기 위해 그와 함께 여행을 다닌 한 제작진은 "젊은 사람을 능가하는 연기에 대한 열정, 지적인 매력, 자상함까지 이런 어른이 또 있을까 싶다. '사기 캐릭터'가 따로 없다"고 고백했다. "나이도 많은데 자상하지 않으면 어린 친구들이 다 도망가지. 허허. 인간관계인데 엄격해야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큰 규범 안에서 벗어나지만 안으면 되지. 과거에 선배들 중에 엄격한 걸 하나의 권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사인 받으러 오면 다 거절하고. 나는 사인 다 해주지.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60년 째 연기인생. 그는 스스로도 배우가 될 줄은 몰랐다. 다만 당대 최고의 예술영화들을 섭렵하면서 연기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영화광이었음을 증명하듯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명감독과 영화들을 줄줄 읊으며 당시를 회고했다. "'자전거 도둑' '밀라노의 기적' '무방비 도시'같은 영화,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같은 당대 최고의 감독들이 그때 다 나왔어. 지금 영화사에 남는 걸작들이지. 프랑스 영화로 치면 장 콕토가 대단했고,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 '오셀로'같은 작품들이 다 영화로 나왔지."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대학교 2학년 겨울에 영국의 거장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출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봤다. 당시 배우는 '딴따라'로 통하는 시절이었다. 엄청난 천대를 받았다. 그런데 저 경지면 예술이다, 저건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는 어떻게 배웠나.

▲거의 독학이었다. 외국 명배우들의 연기를 많이 봤다. 그 다음이 책이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극론을 일본에서 구해다 봤다. 한국에는 아직 안 들어왔을 때다. 일본의 공연예술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초기 한국 연극, 영화, TV드라마의 메소드는 일본에서 그대로 가져온 게 대부분이었다.

연극 무대에 오르고싶어서 이해랑 선생이 하시던 명동 다방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은 적도 있었다. "명동길에 '동방살롱'이라고 있었어요. 이해랑 선생 아버님이 부산에서 의사인데 연극 돈벌이 안되니까 아들 먹고 살라고 만들어주신 거였지. 예술인, 문인들의 집결지였죠. 박인환, 김수영 같은 시인들도 드나들고. 거기 알짱거리고 있으면 혹시나 해서 뽑힐까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고. 하하. 그래서 우리끼리 해보자고 한게 실험극장이었어."

현재 극단 현대극장을 이끌고 있는 김의경 등과 함께 창단한 '실험극장'은 광복 후 가장 오랜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사립극단으로서 수많은 명작들과 배우들을 배출했다.

그런데 역시나 연극은 배가 고팠다. 제대 후 군에서 방송실장으로 월급쟁이도 해봤지만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만 굳어졌다. 드라마센터로 가서 이해랑 선생에게 배역 하나만 달라고 했다. 마침 '로미오와 줄리엣'의 머큐쇼 역할이 비어있었다. "이제부터는 굶을 각오를 하고" 연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고생 길을 말리러 찾아왔을 때 "이거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다른 일을 해볼 재간도 없었어. 일찌감치 사업 능력이 없다는 건 간파했고 고시 공부를 하기도 늦었고." 아버지는 결국 "뭘 하든 일류가 되면 밥 벌어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겠냐"며 항복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끼가 있었나.

▲없었다. 끼가 있다고 연기를 잘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끼에 의존하면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니 정체된다. 연기 뿐만이 아니다.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해야 끊임없이 노력해 경지에 도달한다. 좀 떴다 하면 스스로 카리스마를 형성하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나이 먹고 위상이 높아지니 마땅치 않으면 주먹질하고 돌출행동도 한다.

―그러면 연기는 무엇으로 하는가.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한다.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예술창조라는 것은 하다보면 업적이 나온다. 그런데 그 역시 과정일 뿐이지 끝은 아니다. 해석을 달리하면 다른 발견이 나오고 그걸 표현할 때 보는 재미가 생긴다. 그림도 잘 그린다고 맨날 똑같은 것만 그릴 수 없지 않나.

―작품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인가.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댄포스도 단편적인 역할분석만하면 권위 내세우고 소리만 빵빵 지르면 된다. 그러나 인물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디테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배우라면 자기 역할 분석을 투철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를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나? 평범한 배우지." 이유를 물으니 "평범하니까 제대로된 상을 못받았지"하며 껄껄 웃었다. "중간에 TV드라마로 옮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연극에 좀 소원해졌지."

―배우로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자신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동질감을 느껴서가 아닐까.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느냐다. 시트콤에서 '야동 순재'로 인기를 얻은 것도 젊은 아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친근했겠는가. '우리 할아버지도 나처럼 야동에 관심을 갖네' 그런 거다.

1964년 TBC 개국부터 1980년 언론 통폐합 때까지 16년 간 전속 탤런트로 안방극장을 휩쓸었다. TV 드라마를 하게 된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1968년까지 연극을 12년 넘게 했는데 한 푼이라도 받은 적이 없어. 처음 돈을 받았던게 1978년에 대박났던 '세일즈맨의 죽음'이었으니까."

1966년 결혼한 그는 더욱 가열차게 작품을 했다. 영화같은 경우 한번에 10편 넘게 계약을 하고 촬영을 했다. '국민 아버지'라는 수식어에 이어 '국민할배'까지, 아버지 역할을 수없이 많이 한 그였지만 실제로는 "형편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구실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한달에 집에서 자는 날이 많으면 일주일. 집에 들어오면 고단해서 쓰러져 자니까 남편 구실도 못했지. 그런데 어떡하나 안 그러면 밥을 못 먹는데. 10년 정도 그렇게 하니까 연희동에 집 한채 짓게 되더군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로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을 무렵 그는 14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중랑갑 민정당 후보로 나가 700여표 차이로 석패한 후 다음 선거에서 3500표 이상 차로 압승을 거뒀다. "완전히 내버린 지역이었어요. 3당 합당까지 했는데도 공천 희망자가 한 명도 없었어. 개천을 복개하다가 우리 면목동만 딱 남겨놨으니 알만 하지." 고(故) 김영삼 전 대통의 후보자 시절 선거유세도 함께 했다. "한 번은 국민들의 환호가 너무 나한테 쏠리는 거야. 다음 유세부터는 후보자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해 선도 연설을 하고 그랬지."

정치는 계속 하지 않은 건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내 지역에 서비스 했고 빨리 내자리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했지. 그 때 딱 60세였어요. 기력이 남아있을 때 돌아가야 후배들 신세 안지고 내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지요"

드라마, 연극을 병행하면서 후학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는 그다. 연극 출연 중에도 자신이 석좌교수로 있는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거의 매일 학교를 찾는다.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언어 훈련이 연기의 시작이다. 거리(street)와 거:리(distance)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잘못하다간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되기가 십상이다.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돌을 비싼 돈에 모셔오니 작품이 한심해 지는 거다. 특히나 언어로 밥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표현하는 언어가 연령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부 전달해야할 책임감이 있다.


배우로서 이룰 만한 건 다 이룬 그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맡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한번도 배우로서 충족된 적이 없어요. 그러니 계속 무대에 오르겠지."

그는 "화려한 배우를 꿈 꿔본적도 없다"고 했다. "그냥 항상 하는 건데 경쟁은 어디에나 존재 하는 것이니 역량이 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지 더 바라는 것도 없어. 아쉬운 건 '햄릿'을 못해본 것.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서 아무도 안시켜 주겠지? 하하."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 배우 이순재는

△80세 △함경북도 회령 출생 △서울대 철학과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 △극단 실험극장 창단 멤버 △제14대 민자당 국회의원 △민자당 부대변인 △경희대 한의학 명예박사 △서울대학교 강사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보관문화훈장 △제6회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 △제11회 부일영화상 신인남우상 △제1대 연기자협회 회장 △제15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분례기'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집념' △MBC 연기대상 사극부문 황금연기상 '이산', MBC 방송연예대상 대상 '거침없이 하이킥'△제1회 서울문화예술대상 문화예술인부문 대상 △제20회 금계백화장영화제 남우주연상 '그대를 사랑합니다'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및 고문 SG연기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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