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하고 싶으세요? 그럼 우리 문예지부터 사세요.”

      2018.02.02 10:21   수정 : 2018.02.02 10:21기사원문


“등단을 원하십니까? 등단은 귀하의 선택사항으로 본지의 안내를 수용하거나 사양하실 수 있습니다. 문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아래 스냅사진, 당선소감문, 등단지 구매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만약 마감일까지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경우 당선을 취소하고 발표하지 않습니다.

” 한 소설가 지망생이 투고한 소규모 문예지로부터 받은 메일이다.

이렇듯 문학계의 병폐로 여겨진 ‘등단 장사’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등단 장사란 군소 문예지가 공모전을 연 뒤 지원자들에게 당선·등단을 미끼로 평생구독이나 책 구입을 강요하는 행위다.

등단장사는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실시한 ‘문학 장르 활성화를 위한 문예지 실태조사’에서 한 자문위원은 “수많은 시 전문지들이 등단용 문예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문예지 발행의 재정적 수단을 거의 등단 시인에게 의존하는 걸로 알려졌다”고 비판했다.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부이사장 역시 “영세한 문예지들이 등단장사를 통해 함량 미달의 문인들을 양산하는 경우가 적잖은 게 사실”이라며 “협회 차원에서 제재할 수는 없지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일례로 인지도가 낮은 계간 A 문예지의 경우 4개월마다 신인 공모전을 실시한다. 당선자에게 1만2000원 상당의 책 50권 혹은 그 이상을 구매하라고 제안하지만 거부할 시 당선을 취소시킨다. 이런 식으로 지난해 13명을 선발해 1인당 60만원, 최소 780만원의 수익을 올린 걸로 추산된다.

해당 문예지 관계자는 “주변에 책을 돌릴 지인이 많거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50권 이상 주문하기도 한다”며 “이 책에 실려야 정식으로 문인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우리 문예지는 재능기부만으로 책을 만들고 있어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신인을 등단시킬 여력은 없다”면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면 강요하진 않지만 당선은 취소된다”고 덧붙였다.

동호회 수준으로 운영되는 이 문예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인터넷에서는 등단 장사를 성토하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자신을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밝힌 B씨는 “함께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스터디 동료가 별안간 등단을 했다며 그룹을 떠난 적이 있다”며 “알고 보니 소규모 문예지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평생구독 명목의 돈을 지불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예지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재정적인 부분을 등단 장사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으로 국내 문예지는 244종에 이르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문예지인 문예중앙, 작가세계 등은 지난해 재정난으로 인해 휴간상태에 들어갔다.

일각에선 등단 제도를 악용한 상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에선 등단이 ‘문인 자격증’으로 취급 받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등단이 쉬운 군소 문예지를 통해 소설가·시인 등 소위 ‘타이틀’을 획득, 기성작가로 활동하려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맞물렸다는 분석이다.

A 문예지 관계자도 “문인이 되고 싶지만 신춘문예 등지에서 당선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문예지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등단을 통해 기성 작가로 인정받는 경우는 우리나라가 사실상 유일하다. 해외에선 야인으로 활동하던 중 출판사 혹은 독자들의 지원을 받아 스타작가가 된 이들이 적잖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낸 조앤 K. 롤링이나 블로그 연재 중 독자들의 지지로 영화화까지 된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시각에 문단에서도 기존 등단 제도에 대한 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해 3월 계간 문예지인 21세기 문학은 20년간 유지해 온 신인상을 폐지, 미등단 작가의 원고도 함께 지면에 싣기로 했다. 또 황현산 평론가, 김정환·김혜순 시인은 주류 문단에서 주목 받지 못한 시를 재발굴하는 ‘삼인시집선’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광복 부이사장은 “최근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군소 문예지에 투고하는 지망생들이 감소하는 상황”이라며 “등단 장사를 통해 데뷔하는 이들이 작가회·문학회를 만드는 걸 제한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smw@fnnews.com 신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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