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 뒤 의사 바꾸기 ‘과실’ 아닌 ‘상해·살인’으로 처벌해야

      2021.04.04 14:39   수정 : 2021.04.04 14:39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수술 과정에서 마취 뒤 의사 바꾸기가 ‘과실’ 아닌 ‘상해·살인’으로 처벌될 수 있는 길이 열릴지 주목된다.

수술 중 경력 없는 의사가 몰래 교대해 환자를 사망하게 한 유령수술 사건에서 유족 측이 검찰에 업무상 과실이 아닌 살인과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족이 수술실 CCTV를 확보해 수백차례 돌려보며 사건을 분석한 ‘권대희 사건’ 이야기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여러 환자를 동시에 수술하는 과정에서 집도의가 수술실을 비운 사건으로, 과실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유령수술 사건을 살인이나 상해 혐의로 처벌한 적 없는 한국 법체계에서 첫 번째 판례가 될지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마취 후 의사바꿔치기, '과실' 아닌 '상해로'
4일 법조계에 따르면 권대희 사건 유족 측이 최근 검찰에 공소장변경 신청서를 제출했다. 권대희 사건 피고인인 집도의 장모씨와 마취의 이모씨, 유령의사 신모씨 등에게 적용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살인과 상해치사 혐의로 변경해달라는 요청이다.

사건은 2016년 권씨가 서울 서초구 ㅈ성형외과에서 안면윤곽수술을 받으며 벌어졌다. 당시 이 병원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환자에게 고지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수술을 하는 이른바 공장식 유령수술을 진행했다. 집도의가 뼈만 자르고 다른 수술실로 옮겨가면 경험이 일천한 유령의사가 이어받아 수술을 마무리하는 식이다.

본지 취재 결과 당시 유령의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지 6개월 된 신출내기로 확인됐다.

문제는 권씨가 수술 중 다량의 피를 흘렸다는 점에 있다. 권씨가 수술 중에만 45kg 성인여성 전체 혈액량에 해당하는 3.5L의 피를 흘렸지만 의료진이 제때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권씨는 이 병원에서 한 차례 수혈도 받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방치돼 끝내 사망에 이르렀다. 유령의사까지 다른 수술실로 자리를 비워 간호조무사 홀로 권씨를 지혈한 시간만 35분에 달했다.

경찰과 검찰은 의료진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권씨가 수술 전 ‘원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는 광고내용과 설명을 믿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기존에 의사의 수술행위에 상해나 살인 혐의를 적용한 전례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 2014년 그랜드성형외과 유령수술 사태엔 사기 혐의가 적용됐고, 의료기기 영업사원 등의 수술행위도 무면허 의료행위로 처리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법조계에선 상해 등 중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신체에 대한 위법한 침해행위' 판결도
최근 사건을 검토한 권대희 유족 측이 살인과 상해 혐의로 공소장 변경을 하기로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에게 고지하지 않고 집도의가 교대하고 기본적인 처치조차 않고 비정상 징후를 보이는 환자를 두고 의료진이 퇴근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상해 혐의를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권씨 사건을 대리한 박호균 대표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는 “그동안 ‘의사의 의료행위=치료행위’라는 관점에서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으로만 처벌해 왔지만, 공장식 수술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한 수술이 만연한 상황에서 의사라는 이유로 과실범으로만 다루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며 “미필적 고의를 고려할 때 살인죄나 상해치사죄의 고의범으로 공소장을 변경해 본인들의 행동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유족 측은 검찰에 제출한 서면에서 △3.5L의 출혈이 당시 권씨 전체 혈액량의 61~71%로 추정된다는 전문기관의 소견 △혈액이 뒤늦게 도착했음에도 수혈을 하지 않은 사실 △큰 병원으로 옮기는 조치도 문제 파악 후 바로 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킬 만한 가능성 또는 위험성이 있음을 인식하거나 예견할 수 있었다”며 “살인죄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은 살인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상해죄로라도 처벌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상해죄와 살인죄 모두 수사와 수술실CCTV 분석을 통해 밝혀진 사실관계 위에서 적용될 법리만 바꾸는 것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의 방어권 행사에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근래 재판부가 유령수술 등 의료범죄 사건에서 의사들의 범죄에 전보다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다는 점도 호재로 분석된다.

지난해 말 서울중앙지법 민사39단독 정우정 판사는 그랜드성형외과 유령수술 피해자 김모씨와 한모씨가 전 원장 유모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일반적으로 수술의 집도의가 누구인지(특히 해당과목의 전문의인지 아닌지)는 환자가 수술을 받을 것인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주된 고려요소”라며 “(집도의 교체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수술할 것으로 믿고 수술비용을 지급한 원고에 대한 기망에 해당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원고의 신체에 대한 위법한 침해행위”라고 적시했다.

당시 재판부가 ‘신체에 대한 위법한 침해’를 적시한 대목은 법조계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유령수술을 사실상 상해죄로 규율할 수 있다는 법리적 해석이란 분석이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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