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사의 서막 '정조 독살설'
2021.07.31 01:30
수정 : 2022.03.02 18:02기사원문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세종(世宗, 제 4대 왕) 이래 최고의 성군이자 개혁군주로 일컬어졌던 정조(正祖, 제 22대 왕)가 병상에 누운 지 불과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개혁이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터진 '대상'(大喪)이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근대화'(近代化)의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던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 역사적인 분기점에서, 조선은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이에 부합해나가지 못하고 되레 퇴행과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 당대 및 후대의 사람들은 정조가 보다 오래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로 원통(寃痛)해 했다.
이런 가운데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까지도 역사학계 등에서 큰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바로 '정조 독살설(毒殺說)'이다. 당시 행해졌던 의료 처방 및 정국 구도에 기반해 독살 가능성은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의 가능성을 낮게 보며 몇 가지 근거를 기반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그 진위(眞僞)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정조'라는 보기 드물게 영민(英敏)했던 군왕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투영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조의 개혁정치와 죽음 등이 갖는 역사적 무게감은 너무나 막중했던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드라마틱했던 개혁정치와 의문의 죽음 및 논란, 정조 사후 조선 정국의 퇴행적 변화 등을 되돌아봤다.
■사도세자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정조는 잘 알려진 대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英祖, 제 21대 왕)의 장자였지만, 영조와의 계속된 갈등 끝에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나 품성 측면에서 매우 보수적이었던 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갈수록 공부를 게을리하고 기행(奇行)을 일삼는 일이 빈번했다.
세자에 대한 실망감이 컸던 영조는 틈만 나면 사도세자를 심하게 다그쳤고, 그럴 때마다 사도세자는 더욱 엇나갔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대놓고 영조의 정치적 대척점에 서있는 언행을 하고 다녔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당시 기록들(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등)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큰아버지이자 영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경종(景宗, 제 20대 왕)을 추종하는 소론(少論)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였고,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현대 의학은 사도세자의 이러한 행각을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위축감 및 자괴감과 계속된 책망에 대한 반감이 어우러져 이 같은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분석이다.
더욱이 사도세자의 정치적 반대파가 된 노론(老論)은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모함하며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참다 못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해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있는 동안 그의 어린 아들인 정조는 이를 적나라하게 지켜봤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영조는 이를 외면했다. 이 같은 영조의 비정한 결정에는 사도세자의 기행도 한몫 했지만, 사도세자가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정적'(政敵)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세자 사건(임오옥(壬午獄))을 노론·소론 간 당쟁(黨爭)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약 9일을 뒤주에서 버티다가 결국 아사(餓死)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 아들이었던 정조의 미래도 온전치 않아 보였다. 특히, 노론 벽파(僻派)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정조를 세손의 위치에서 폐할 것을 주장했다. 추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사도세자 사건을 빌미로 보복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기저(基底)에 깔려있었다. 반면, 노론 시파(時派)는 정조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 결정권자인 영조의 의중(意中)에 관심이 집중됐다.
영조는 일찌감치 정조를 자신의 뒤를 이을 군왕으로 염두에 뒀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달리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고 배우기를 즐겨해 영조를 기쁘게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굳이 뒤주에 가둬 죽인 방식을 봐도 영조가 정조를 생각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만약 사도세자에게 사약 등을 내릴 경우 정조는 명백하게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뒤주에 가둬 죽음을 유도하는 애매한 형벌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入籍)시켜 왕위를 이을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부여해줬다.
그럼에도 사도세자의 반대 세력이었던 강력한 노론 벽파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세손 정조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매사에 조심하게 했고, 정조 역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등 조심스런 모습을 보였다. 노론 벽파는 정조의 동정을 살피려 은밀히 정조의 거처에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 대놓고 정조를 무시하기도 했다. 당시 노론 벽파의 핵심이었던 홍인한은 영조와 정조 앞에서 "동궁(정조)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어느덧 영조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자 정조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키려 할 때도 노론 벽파는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의 병환이 갈수록 깊어졌고, 서명선 등 소론이 정조를 지지함에 따라 대리청정은 실현될 수 있었다. 더욱이 시강원 춘방관이었던 홍국영 등이 정조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섰다. 정조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3개월이 지난 1776년, 정조의 든든한 후견자였던 영조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세손 정조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변의 위협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정조의 첫 일성(一聲)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실을 정조는 사실상의 첫 공개석상에서 과감히 고백한 것이다. 이는 정조의 국정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는데, 노론 벽파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정조 즉위년에 왕이 머물던 존현각을 자객이 습격한 것이다. 이들은 정조의 목숨을 노렸다. 다행히 오랜 기간 신변의 위협을 느껴왔던 정조가 그날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책을 보고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던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홍계희의 조카 홍술해의 아내가 무당의 주술을 이용해 정조를 살해하려 한 것과 정조 살해 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역모(逆謀) 사건에는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와 친밀했던 상궁과 환관들도 참여했다. 사실상 사도세자 및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 사건에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간택(揀擇)한 왕비였고,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으며 정조와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영조가 죽자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됐고, 기실 노론 벽파의 구심점이 됐다. 정순왕후의 친부였던 김한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는 왕이 되긴 했지만, 즉위 초 목숨마저 위협을 받는 실로 '왕 같지 않은'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조정은 지난 수십년 간 행정과 군권(軍權) 등을 실효적으로 장악한 노론 벽파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정조를 폐위할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었고, 실제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정조는 은밀하지만 치밀하게 '반전'(反轉)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①
정조의 개혁 정치는 궁극적으로 근대화와 왕권 강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우선 외척(外戚) 세력 제거와 세력 균형을 도모하는 탕평(蕩平)책을 시행해나갔다. 당시 대표적인 외척 세력으로 한 편에는 정조를 무시하고 반대했던 홍인한 등이 중심이 된 부홍파(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 가문)가 있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이 중심이 된 공홍파가 있었다.
이러한 외척 세력들은 영조의 탕평책을 통해 득세(得勢)를 했다. 정조는 이들의 존재 자체와 권력 다툼을 '화'(禍)의 근본으로 봤다. 이에 따라 정조는 최측근인 홍국영을 앞세워 홍인한, 정후겸 등을 유배보내며 부홍파의 권세를 약화시켰다. 이어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를 유배보내며 공홍파의 권세 또한 약화시켰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기실 중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외척 세력 제거라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한편, 홍국영의 경우 추후 권력에 취해 세도정치를 펼친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정조는 그마저도 내치게 된다.
이후 정조는 사실상 노론 벽파를 겨냥한 탕평책을 펼쳤다. 정조의 탕평은 영조의 탕평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영조의 탕평은 강경파는 배제하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주력으로 하는 '완론(緩論) 탕평'이었다. 그 결과 노론 중에서 온건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됐다. 반면, 정조는 철저히 왕에 대한 의리(충성)에 기반한 강경한 '준론(峻論) 탕평'을 표방했다. 이 같은 탕평책에는 특정 당파에 대한 구분이 없었던 만큼, 정조는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중앙 정계에서 배제됐던 '남인'(南人)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 '채제공'이라는 인물이 발탁돼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노론 입장에서는 '역당'(逆黨)이었던 남인이 재부상하는 것이 실로 못마땅했지만, 당시 분위기 상 일단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정조의 준론 탕평을 통해 정국 구도는 이전에 비해 균형을 맞춰나가는 모양새였다. 이전에는 정조에게 반대하는 세력인 '벽파'가 다수였다면, 준론 탕평이 이뤄지면서 정조를 지지하는 세력인 '시파'가 세를 불려나갔다. 시파와 벽파는 정조에 대한 세부적인 지지 여부에 따라 나눠졌던 것인 만큼,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남인 내에서도 각각 존재했다. 특히, 정조가 삼정승에 노론 김치인, 소론 이성원, 남인 채제공 등을 임명하는 절묘한 인사를 단행하면서, 정국의 추는 점차 (정조 지지 세력인) 노론 시파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정조는 이 같은 인사 정책을 통해 즉위 초 불리한 정국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②
정조는 즉위 직후 '규장각'(奎章閣) 설치를 서두르기도 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는 관서(官署)였다. 정조는 이 곳에 수많은 서적들 및 군왕 관련 기록서들을 보관했고, 근신(近臣)들을 배치해 국정과 학문을 논했다. 특히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파격적으로 이서구 등 서자(庶子)들을 기용하기도 했고,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해 규장각에 마련된 교육 및 연구 과정을 신하들이 거치도록 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해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되 1개월에 2회의 구술 고사와 1회의 필답 고사로 성과를 평가했다.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본 후 채점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들이 정약용, 이가환 등이다. 정조가 이렇게 규장각에 공을 들인 것은 올바른 정치를 구현함과 더불어 왕권 강화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신진 정치 엘리트들을 육성해 이들을 중심으로 한 친위 세력을 구축하려는 복안(腹案)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규장각은 정조의 복안대로 승정원, 홍문관을 대신해 군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또한 정조는 민생(民生)을 돌보는데도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전국 각지에 역량 있는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해 지방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자 했고, 수령들에게는 지방의 급박한 사정들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왕에게 직보하도록 했다. 상업 진흥에 있어서는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전매 특권인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상업 행위가 보장되면서 소상공인이 살아나고 물가가 안정되는 등의 큰 성과가 나타났다.
아울러 정조는 자기 상전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몸을 피한 노비를 찾아내 본 고장에 돌려보내는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폐지하기도 했다. 이는 추후 순조 때의 공노비 해방의 단초가 됐다. 이 밖에 정조는 버려진 고아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기르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을 제정했고, 학문과 문화, 과학도 크게 진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왕의 덕(德)을 칭송하며 활기차게 생업에 매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③
왕위에 오른 이후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追崇) 작업을 진행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호를 '장헌'(莊獻)으로 고치고 묘를 격상시켰다. 이후 1789년 7월에 서울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고 명명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와 여타 대신들은 그저 정조의 효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이를 통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화성(華成) 건설'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개혁 정치의 본산(本山)으로 삼고, 기존 '판'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모색했다. 일종의 승부수였던 셈이다. 우선 화성 건설에는 정조의 심복(心腹)들이 총출동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총책임을 맡은 수원 화성은 약 10년으로 전망됐던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때에도 노론 벽파는 화성 건설을 적극 반대했지만, 정조는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며 화성 건설을 흔들림 없이 진행해나갔다. 궁극적으로 정조는 화성을 국가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조는 화성에 '십자로'(十字路)를 만들고 도로 양편에 큰 상가를 조성했다. 당시 정조는 채제공에게 화성 인구의 증가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는데, 이에 채제공은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다"고 답했다. 정조는 이를 기반으로 국가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조는 화성 주변에서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을 막아 '만석거'(쌀 만석을 생산해 백성들을 풍요롭게 먹고 살게 하겠다는 의미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만(萬)'자를 사용해 자주 국가를 천명하려는 의도)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화성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대유둔'(또는 대유평)이라는 큰 국영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 대유둔 농토의 일부는 화성 주둔 군사들에게, 또 다른 일부는 농토가 없는 수원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모든 농사 자재는 둔소(화성 관리사무소)에서 제공했고, 대유둔에서 얻은 수확의 60%는 개인이, 나머지 40%는 화성유수부에 세금으로 내게 했다. 이 같은 정책에 따른 효과는 절묘하게 나타났다. 활발한 농경 활동으로 생산량이 늘어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됐고, 여기서 나온 세금으로 화성에 주둔했던 군사들의 월급을 줌에 따라 백성들은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군포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아가 정조는 대유둔의 사례를 전국 8도에 전파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십자로를 통해서는 상업혁명의 모범을, 대유둔을 통해서는 농업혁명의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아울러 정조는 결정적으로 화성에 (앞서 거론했던)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군영을 설치했다. 1785년에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창설했는데,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뒀다. 8년 후 정조는 이 장용위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구분됐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장용영의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던 만큼,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五衛) 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기실 노론 벽파들의 군권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점차 장용영은 수어청과 총융청 등 노론 벽파들의 군사적 기반을 압도하게 된다.
전세 역전을 직감한 정조는 장용영의 군사들을 동원해 노론 벽파가 보란 듯이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정조는 화성 능행(陵幸)길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 때 수많은 장용영의 군사들이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를 겹겹이 에워싸고 호위했다. 이 장면을 노론 벽파 대신들은 매우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 총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했는데, 결국 이 같은 능행은 단순한 참배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노론 반발, 의문의 죽음
화성 건설을 기점으로 정조와 노론 벽파의 희비는 엇갈렸다. 정조는 개혁정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 반면 노론 벽파는 위축됐고 정조의 친위 쿠데타와 천도 가능성 등에 대해 실제적인 위협을 느꼈다. 심지어 정조는 노론 벽파 대신들 앞에서 왕의 학문적 우월성과 의리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에 위기감이 극에 달한 노론 벽파는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에 이어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이 발생했다. 정조는 새로운 서양 문물은 적극 수용했지만, 사상을 수용하는데 있어서는 상반된 모습을 나타냈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며 배척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노론 벽파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노론 벽파들이 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고, 천주교를 옹호했던 정조의 최측근 채제공 등은 수세에 몰린 후 실각하게 된다. 뒤이어 재상 자리는 이병모, 심환지 등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꿰찼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신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가 다시 득세하는 것에 정조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따라 1800년 5월 정조는 마침내 '오회연교'(五晦筵敎)라는 초강수를 띄웠다. 이는 군신의리 및 통치원칙 등을 밝힌 것이다. 즉,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처단하지는 않을 테니) 용서를 빌라는 경고와 함께 향후 정약용, 이가환 등 남인들을 재상에 임명해 크게 쓰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노론 벽파에 대한 협박이자 백기투항 권고였다. 정조실록에는 "내가(정조가) 하려고 하는 정치를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인데, 내가 이처럼 분명히 일러준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여러 말을 하지 않겠다...(중략)...의리를 천명하든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든지 간에 오직 자기 한 몸에 매인 일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또 보람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나와있다.
이에 노론 벽파는 말 그대로 큰 충격에 빠졌다. 코너에 몰린 노론 벽파는 어떻게 대응할 지를 고심했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정국의 주도권은 정조에게 있었다. 100년 동안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왔던 노론 벽파가 마침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정조가 오회연교를 발표한 뒤 보름이 지나 병석에 몸져 누웠고, 그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때 정조의 나이 49세였다. 실로 보기 드문 영민함과 불굴의 의지로 조선 후기 눈부신 개혁을 이끌었던 정조는 끝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석연치 않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독살설 논란
정조의 죽음은 곧바로 격한 논란을 유발시켰다. 바로 왕의 독살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 주장은 정조와 뜻을 함께 했던 일부 남인들을 중심으로 나왔다. 특히, 정조 사망 후 2개월 뒤 인동(현 경북 구미시) 지역의 남인 출신 거족(巨族)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이 "임금이 죽었으니 의관(醫官)이 의심스럽다"라며 처음으로 정조 독살설을 제기했다. 그들은 노비들을 동원해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하겠다며 관아를 습격했지만, 이내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
아울러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정조 독살설과 관련한 내용을 담았다. 그는 "...만나면 전해져 들리는 말들을 이야기 했으니, 당시의 한 정승이 역적 의원인 심인을 천거해서는 독약을 올려 바치게 했건만, 우리들의 손으로 그 역적놈을 제거할 수 없다면서 비분강개하여 눈물까지 흘리곤 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정승이란 바로 좌의정 심환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영수(領袖)였다. 또한 정약용은 "고래(정조)가 해달(노론 벽파)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며 정조 독살설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이 밖에 창원, 의령, 하동 등 경상도 지역에서는 왕의 독살설을 기반으로 백성들을 선동하는 익명의 글들이 연이어 나붙어 조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정조 독살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그 근거로 우선 당시의 정국 구도를 거론한다. 화성 건설 등으로 정조의 개혁정치가 절정에 이르고 오회연교가 발표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론 벽파가 선수를 쳐 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조가 죽기 전 처방받았던 의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정조는 사망하기 보름 전부터 종기가 발생했는데, 그 원인은 해묵은 화병이었다. 수십년 동안 면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노론 벽파)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 때 정조가 처방을 받았던 의료는 수은 성분을 갖고 있는 경면주사(鏡面朱砂)를 태워 환부에 쐬는 '연훈방'이었다. 연훈방을 처방받은 직후에는 정조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했지만, 처방 후 3일 째부터 정조는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숨을 거뒀다.
이에 따라 연훈방 처방으로 인한 수은 중독으로 정조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수은 중독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대신 초반에 종기를 째는 등의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것과 연훈방 등을 짧은 시간에 과다 사용해 다량의 출혈을 유발한 것, 그리고 종기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음에도 역효과를 유발하는 보약인 '경옥고'를 복용하게 한 것 등을 정조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이를 종합해보면 정조는 궁궐 주치의 격인 내약원의 잘못된 처방으로 인해 죽음을 맞았는데, 내약원의 총 책임자가 정조의 정적이었던 좌의정 심환지였음을 감안할 때 그러한 잘못된 처방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종기 치료의 대가이자 정조가 무척 총애했던 중인 출신의 명의 피재길이 하필 정조가 위급할 시기에 누군가의 지시로 지방에 내려간 것, 그리고 정조가 죽기 직전 그의 곁에 정순왕후가 있었다는 것과 정조의 마지막 말이 정순왕후가 거처하고 있던 '수정전'이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으로 읽혀지고 있다.
하지만, 정조 독살설을 반박하는 주장들도 만만치 않다. 정조 독살의 근거라고 내세우는 사료들은 가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 과장된 것이고, 몇 가지 근거들을 볼 때 정조 독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우선 노론 벽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죽음을 확인한 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가장 최근에 발견된 정조의 어찰(御札)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정조와 심환지가 정적 관계가 아니라 '밀월'(蜜月) 관계였다는 것이다. 또한 정순왕후가 사망하면서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세력이 주축이 된 정조 계열 시파가 집권했을 때 정조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 제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정조 독살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정조 사후와 독살설 의미
정조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재로서는 독살설의 진위 여부와 관련해 무엇이 진실인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러한 독살설이 나오는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정조 독살설에는 정조라는 위대한 군왕의 죽음과 그의 개혁정치의 좌절 등에 대한 아쉬움 및 슬픔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조가 조선의 군왕으로 존재하고 있을 당시 전 세계에는 '근대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영국 산업혁명 등이 대표적이다. 정조의 조선도 이 거대한 물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조의 헌신적인 주도로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근대적인 개혁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었고, 다시 한번 크게 '웅비'(雄飛)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이라는 뜻밖의 불행으로 이 모든 움직임은 일순간 중단된다. 정조 사후 조선은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휘어잡았고, 정조의 모든 개혁 정책들은 폐기됐으며 정약용 등 정조의 최측근들은 쫓겨났다. 이후 안동김씨 등이 '병인갱화'(丙寅更和)로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행해졌다. 반면, 왕권은 땅에 떨어져 사실상 군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사회 도처에서는 각종 폐단(弊端)들이 횡행했다.
이처럼 역사적 흐름에 어긋나는 퇴행과 반동은 조선을 끝내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이 모든 조선 '통사'(痛史)는 바로 정조의 의문의 죽음에서 비롯됐으며,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한탄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 같은 견해에 기반해 (비록 완전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독살설은 정조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거론되고 있고, 개혁군주 정조와 그가 꿈꿨던 세상을 조망하게 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