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No" 해도 이사회가 "Yes"… 대기업 달라졌다

      2021.09.09 18:40   수정 : 2021.09.09 18:40기사원문
재벌 총수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던 시대가 가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속도를 내면서 의사결정 과정도 합리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사회 멤버인 사내·사외 이사들이 총수와 다른 의견을 내는가 하면, 총수 결정에 반대 표를 던지는 등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고 있다.



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20일 ㈜SK 이사회에 참석해 기존 H 투자사에 대한 추가 투자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최 회장과 함께 국민은행 부행장 출신의 이찬근 사외이사도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나머지 사내이사 3명과 사외이사 4명이 찬성하면서 안건이 가결(통과)됐다.

재계에선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에서 놀랍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사내·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 데다 그룹 총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반수 찬성표를 얻어 안건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SK 주식 18.44%를 보유한 최대주주이자 사내이사다.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 안건은 보통 사전에 조율이 되기 때문에 반대 의견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면서 "그룹 총수가 반대표를 던진 안건이 가결까지 됐다니 놀라운 일"이라고 전했다. 이어 "SK 이사회 멤버들이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고 이사 한 명, 한 명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SK그룹은 다른 기업들이 ESG 중 환경(E)·사회공헌(S)에만 치중할 때 지배구조(G) 개혁에도 힘쓰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곧 열릴 주주총회에서 인사위원회를 인사보상평가위원회로 확대·개편하는 내용으로 정관을 개정한다. 그동안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고 자격을 심사하는 역할에만 머물던 위원회가 사내이사 평가, 보상 등 포괄적인 인사권한을 갖는다. 그룹 총수가 계열사 인사를 좌지우지하기보다는 이사회 평가를 바탕으로 대표이사를 선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SK㈜ 관계자는 "SK㈜는 이사회 산하에 '인사위원회'와 'ESG위원회'를 신설해 핵심 경영활동을 맡기는 등 이사회가 독립된 최고 의결기구로서 권한과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혁신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2019년 초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사회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도 지배구조 개혁에 나선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지난 5월 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지배구조를 이사회 중심으로 강화했다.
자신이 사임한 이사직에 고영훈 중앙연구소장 부사장을 올린 바 있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인 채이배 전 민생당 의원은 "이사회 구성원들이 안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그동안 그룹 회장이 결정하면 이사회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면서 "하지만 SK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