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싼 일본이 부럽다? 비정규직 늘고 인재는 떠난다

      2021.10.31 17:54   수정 : 2021.10.31 18:44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지난 10월 30일 일본 도쿄의 '강남구'으로 불리는 미나토구의 42층 한 일식당.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는데다 입구에서부터 마치 고급 회원제 레스토랑 느낌을 주는 이 곳의 점심 회덮밥 가격은 2000엔(2만600원, 세금 제외)이다. 해산물 샐러드부터 계란찜, 회, 밥과 장국, 디저트까지 나오는 회정식 셋트 메뉴는 2400엔(2만4700원)이다. 내심, 호텔 식당 정도의 가격이겠거니 '다소 긴장'했던 사람들은 '가성비 갑'인 식당의 가격표를 보고는 "생각보다 싸다"며 짐짓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같은 건물 2층에는 스타벅스가 있다. 이곳의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한 잔의 가격은 385엔(세입, 약 3960원)이다.
4100원인 한국 스타벅스보다 150원 정도 싸다. 또 그 옆 식당 앞 매대에는 400~600엔짜리 점심 도시락들이 즐비하다.

전세계 디즈니랜드 중에서 일본 도쿄의 디즈니랜드 입장료(8200엔, 8만6000원)가 가장 싸고,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 가격도 일본이 가장 싸다. 한국 다이소가 사실상 '1000원 숍'을 탈피한 반면, 일본의 다이소는 극히 일부 상품을 제외하고는 '정말' 100엔(세금제외)이다. 미국에서 5.66달러인 맥도날드 빅맥은 일본에서는 390엔이다. 미일간 환율을 감안하면 640엔은 돼야 하지만, 40%나 저렴하다.


■"왜 싸졌나"...디플레, 가격 메커니즘 붕괴

과거 20년 전 '비싼' 일본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의 물가가 생각보다 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기간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연평균 2%수준으로 꾸준히 상승했고, 한국 역시 상승세를 밟아왔다. 반면 2000년 이후 20년간 일본에서 물가가 상승한 해는 7개년 뿐이고, 실제 일본 슈퍼마켓에서 파는 식료품, 생필품 등 약 1800여개 품목을 조사해보니 그중 절반의 가격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닛세이 기초연구소 김명중 주임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물가수준은 1999년 한국의 2.8배였지만, 2019년엔 1.24배로 차이가 크게 좁혀졌다. 일부 품목에서는 한일간 '가격 역전'까지 발생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디플레이션'이 지난 20년간 일본 경제를 휘감은 결과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 비해 물가 수준이 낮아졌다면, 일본 국민들의 삶은 그 만큼 윤택해진 것일까.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또 과거 자신들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일가. '저렴해진 일본'(야스이 닛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가는 '생산, 소비, 분배, 고용'의 일국 경제활동의 '결과물'이자 '표식'이기도 하다. 물가가 정상적인 상승 궤도를 장기간 이탈했다는 것은, 생산, 소비, 분배, 고용이 제대로 선순환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당장은 싸졌다고 좋아할 수 있지만, 이것이 장기화되면, 경제 어딘가가 반드시 병들어있다는 '적신호'라는 얘기다.

일본의 물가가 국제적으로 제자리 수준이거나, 후퇴한 이유는 버블경제 붕괴 후 기업들이 판매를 유지하기 위해 제품가격 인상을 자제한 것이 1차적 원인이다. 섣불리 올렸다가는 매출 감소가 뻔하기 때문이다.

기업 뿐만 아니라, 소규모 점포들도 가격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도쿄 신바시 지역의 한 마시지숍의 1시간짜리 전신 스포츠 마사지 가격은 3500엔(3만6000원)이다. 서울 도심보다도 싸다. 혼자 이 작은 점포를 운영하는 가게 주인은 "월세 약 35만엔(360만원)과 전기·수도세 등 공과금, 시간제로 부르는 마사지사들과 임금을 나누게 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가격을 올릴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가격경쟁이 심해서 조금이라도 올리면 그나마 있던 손님도 떨어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정규직 증가...중간계층 소비력 약화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한 비용 인상분의 칼날은 기업 내부로 향했다. 기업들은 임금 인상을 자제했으며, 저임금 비정규직을 뽑아썼다. 정규직 임금에 크게 못미치는 비정규직이 늘면, 국가 전체적으로 소득이 증가하지 않고, 이로 인해 소비가 눌리게 된다. 1990년 전체 고용의 20%였던 일본의 비정규직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저임금 비정규직의 증가는 곧 중산층의 약화를 의미한다. OECD 등에 따르면 1997년 실질임금을 100으로 하면 2018년 미국(116), 영국(127.2)등은 증가한 반면, 일본은 90.1으로 감소했다. 최근 아사히신문은 OECD통계를 기준으로 구매력 평가(물가수준 고려)를 기준으로 일본의 실질 임금이 연 424만엔(약 4360만원)으로 35개 OECD회원국 가운데 22위라고 보도했다. 1990년과 비교하면 30년간 18만엔(4.4%) 오르는 데 그친 반면, 한국에선 30년간 실질 임금이 1.9배로 늘어 2015년에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같은 기간 미국과 영국의 실질 임금은 각각 47.7%, 44.2% 올랐다.

일본의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하지만 1990년과 비교할 때 미국의 GDP는 3.5배로, 중국은 37배로 늘어났지만 일본은 1.5배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일본 경제가 분배와 성장, 모두 침체 국면에 있음을 의미한다.

■소비의 갈라파고스화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와 올해, 일본의 상당수 고급 식당이나 고급 전통여관들이 줄지어 폐업했다. 반면, 값싼 패스트패션의 대명사인 유니클로 점포들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300엔 짜리 쇠고기 덮밥집은 성업을 이뤘다. 다이소·세리아 등 100엔 숍들은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점포수를 늘렸다. 중산층, 중간계층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소비가 햐향평준화 되고 있다는 신호다.

아베노믹스로 인해, 엔화 가치가 급락한 것 역시 일본 국민들의 구매력을 한층 약화시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이와 관련해 아이폰12 Pro Max(512 기가바이트)구입가격을 기준으로 미국과 일본 국민들의 부담 정도를 비교해 제시했다. 월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아이폰 구입 가격은 월 평균 소득의 25%정도인 반면, 일본에서는 45%를 차지했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책 '저렴한 일본(야스이 닛폰)(나카후지 레이 저·닛케이 프리미어 시리즈)에서는 이런 현상을 놓고, 일본 국민들의 구매력이 약화되면서, 일본에서 싼 생활에 만족할 수 밖에 '소비의 갈라파고스파'가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얘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호주 등 해외 부자들이 일본 중산층들이 주춤한 사이, 홋카이도, 도쿄 등지에서 부동산 쇼핑에 열을 올리고, 일본 인재가 중국으로 스카우트되고 있어, 갈라파고스를 향한 외부 위협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디플레이션 장기화, 잃어버린 30년이 왜 위험한지를 일본 경제가 보여주고 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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