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예술가는 떠나도 그 흔적은 영원하다
2022.04.04 18:12
수정 : 2022.04.04 18:12기사원문
■ 권진규가 꿈꾼 '노실의 천사'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 권진규.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2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의 진흙을 사랑했다.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마다하고 그는 내면에 담겨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그 앞에 놓인 돌과 황토에 쏟아부었다. 앙트완 부르델의 정신과 조각이론에 심취했던 그는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한 뒤 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의 수업을 들으며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세상의 영예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듬해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손수 아틀리에를 짓고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그 안에서 마치 세속을 떠난 수행자처럼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했다. 아이디어 구상을 위해 미술 서적과 문학 책을 탐독하고 작업을 마무리할 때면 베토벤 등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 미술 작업 외 유일한 낙이었다. 1973년 5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최고의 작품을 향해 열정과 애정을 쏟았던 그는 피그말리온과 같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중인 대규모 회고전의 제목이 '노실의 천사'가 된 것은 그의 이러한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그가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자작시 중 한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실'은 '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방'으로 그의 아틀리에를 의미하고 '천사'는 그가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순수한 정신적 실체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세상에 남긴 300여점의 작품 중 조각과 드로잉, 아카이브 등 260여점을 모아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그의 작품 초기부터 말년까지를 '입산', '수행', '피안'의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이를 통해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을 넘어선 그의 작품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전시는 5월 22일까지.
■ 백남준이 꿈꾼 '음악 전시'
"어떤 불확정적인 음악도, 악보가 있는 어떤 음악도 작곡하지 않으며(...) 음악을 전시하겠다."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서 TV라는 매체를 통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세계를 선보이며 역사에 남은 아티스트. 그가 꿈꿨던 '음악 전시'가 지금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기념해 진행되는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 전시는 백남준이 1961년에 작곡한 텍스트 악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국내 최초로 시연하는 전시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두번째 교향곡으로 작가 살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지만 예술에 대한 백남준의 생각과 그의 작업세계를 예고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제목과 같이 20개의 방이 악보상에 존재할 것 같지만 실제 작품은 빈방을 포함해 총 16개의 방, 즉 16개의 악장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악보의 모습과는 달리 오선지가 아닌 방으로 추정되는 사각형 모양의 선 위로 음계나 음표의 기능을 대신하는 지시문만이 빼곡히 적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악보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셈여림표가 전부다. 백남준은 16개의 방에 여러 소리와 사물들, 그리고 감각을 자극하는 장치들을 배치했다.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하는 장치와 사물들은 관객의 행동을 유도하며 악장을 넘기듯 방을 활보하게 한다. 이처럼 악보를 넘기는 주체, 즉 방을 넘나드는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어떻게 이동하고 장치를 조작하느냐에 따라 방의 순서나 전체적인 소리를 계속해서 바꿀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교향곡의 연주자로 시각예술가,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사운드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7팀의 예술가 집단이 초대됐다. 이들은 백남준이 남긴 악보를 바탕으로 사운드, 설치,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들을 펼쳐 보인다. 또한 가수, 배우, 소설가, 연구자 등도 낭독과 글쓰기로 연주에 참여한다. 작품의 완성은 관객들, 바로 당신이 참여해야 가능하다. 전시는 6월 19일까지.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