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새로운 핫플, ‘청와대’ 들여다보기

      2022.05.18 08:48   수정 : 2022.05.18 08:48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청와대 개방을 통해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물론 일반인들에 단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관저까지 모두 시민에 공개됐다.

시민에게 공개된 청와대는 곳곳에 한국적인 미가 녹아있으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멋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건축과 자연풍경을 전시한 박람회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외국의 유명 궁전이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가볍게 방문해도 충분히 좋지만, 알고 가면 더 재밌고 흥미로운 곳이 청와대다.



청와대가 자리한 북악산 남쪽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104년 고려 숙종 때는 북악산 아래 별궁을 짓고 남경으로 삼았다.
고려 남경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의 청와대 인근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됐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폐허가 되면서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말 고종 때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의 후원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다가 1991년 지금의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집무실을 옮기게 됐다.

이처럼 1104년 고려부터 시작해서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지금까지 청와대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권력자의 땅이었다. 그랬던 청와대가 이제 시민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서울관광재단은 지난 10일 국민에게 74년 만에 개방된 청와대의 건물들과 그 안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청와대 본관은 조선총독부의 관사를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1991년에 만들었다. 한옥에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15만여 개의 청기와를 얹었으며, 본관 앞으로는 대정원이라고 이름 붙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청기와는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어 조선 전기까지 궁궐 지붕에 쓰였던 기록이 남아있다. 청기와를 만들기 위해선 전략자산이자 화약의 핵심 원료 염초(질산칼륨)가 다량으로 필요했다. 자연적인 초석 광산이 없던 한반도에서 염초는 그 생산이 매우 어려웠으며 군사용으로도 늘 재고가 부족했다. 그만큼 청기와는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청기와는 창덕궁에 있는 선정전이 유일하다.

본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햇빛에 반짝이는 청기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현관 통로 지붕과 본관 건물의 지붕이 계단처럼 연결된 듯 보여 거대한 파도의 푸른 물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본관의 지붕에는 잡상 11개가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잡상이 9개가 있는데 청와대가 근정전보다 격이 더 높은 셈이다.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궁궐의 목조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한국적인 미가 담겨 있으면서도 팔작지붕이 중후한 느낌을 가미한다.


본관에서 소정원을 통해 관저로 향할 수 있다. 대정원이 넓은 잔디밭이었다면 소정원부터는 아늑한 숲이다. 정원 사이로 난 숲길이 아기자기하다. 숲의 나무들도 꽤 울창하여 햇빛이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숲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청와대 부속 건물 곳곳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되어준다. 자연을 통해 막힘없이 공간이 연결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방식인 차경(借景, 자연을 빌려 정원으로 삼는다)을 떠올리게 한다.


관저로 넘어가는 길에는 수궁(守宮)터가 있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는데, 조선총독부가 전각을 허물고 총독관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에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총독관사는 철거했고, 현재는 총독관사 현관 지붕 위에 장식으로 놓여있던 절병통만 옛 자리에 놓아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수궁터에는 수령이 700년이 넘는 주목이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고려 시대부터 이 땅을 지키며 격동의 대한민국을 바라봤을 나무인 셈이다. 절병통은 주목 뒤쪽으로 이어진 잔디밭 위에 놓여있으므로 주목을 먼저 찾는다면 절병통도 발견하기 쉽다.


수궁터를 지나 오르막길을 약간만 오르면 관저에 도착한다. 관저는 본관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ㄱ’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으로 마당이 있다. 마당 한쪽에는 사랑채인 청안당이 있으며, 관저 바로 앞에는 의무실이 있다.

청안당은 사랑채로 '청와대에서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관저와 마당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잠시나마 근심과 걱정을 잊고 마당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관저 뒤로 이어진 숲길로 난 데크를 통해 언덕으로 올라가면 청와대 내의 역사문화유산인 오운정과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오운정은 조선 고종 시대에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던 오운각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오운(五雲)은 ‘다섯 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드리운 풍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과 같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판은 어린 시절부터 붓글씨에 능통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자이다. 오운정 아래로는 짙은 숲이 펼쳐지고, 초록빛 나무 틈 사이로 청와대 관저와 종로 일대의 풍경이 얼굴을 내민다. 오운정을 지나 보물로 지정된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로 가는 길에는 시야가 트여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있으니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다.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여 9세기에 조각된 것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띤 부처님의 얼굴과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교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생김새가 멋스러워 ‘미남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본래 경주에 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서울 남산의 총독관사에 놓였다가 청와대 자리로 총독관사를 옮기면서 함께 이곳으로 왔다.


상춘재는 외국 귀빈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이다. 과거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이 있었던 장소였으나, 청와대 내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외국 손님에게 소개할 장소가 없었기에 1983년에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해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우리의 전통 가옥을 지었다.

상춘재 앞에는 120여 종의 나무가 심어진 녹지원으로 연결된다. 한옥과 숲을 동시에 감상하기 좋은 공간으로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상춘재에서 만찬을 진행했었다. 상춘재 위로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침류각이 있다. 침류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왔다고 한다.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 최고의 녹지 공간이다. 넓은 공간으로 구성 돼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들이 곳곳에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녹지원에는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는데 그 수령이 170년을 넘었다.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이자 출입 기자들이 상주하던 춘추관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 기록 기관이던 춘추관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춘추관 앞 잔디밭(헬기장)에는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청와대 개방 기간 중에는 간이 텐트와 빈백이 놓여있다. 알록달록한 간이 텐트가 찾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펼쳐져 풍경도 제법 좋다.


청와대 본관 쪽으로 돌아가 왼쪽으로 가면 영빈관이 있다.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 행사를 열었던 건물이다.

우리나라를 알리는 각종 민속공연과 만찬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쓰이거나 회의와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며 특히 앞의 돌기둥 4개는 화강암을 통째로 이음새 없이 만들어 2층까지 뻗어 있다. 정면에서 보는 영빈관은 웅장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빈관 앞쪽의 영빈문을 통해 나가면 청와대 담장 옆에 붙어 있는 칠궁으로 갈 수 있다. 칠궁은 조선의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의 신위를 모신 장소다. 조선의 왕과 왕비는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왕을 낳은 후궁 신주는 따로 모시는 공간을 만들어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며 효를 다했다.

1908년에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후궁의 사당들을 이곳으로 합치면서 모두 7개가 모였다고 하여 칠궁이라 이름 붙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의 신주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처럼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검소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지는 장소이다.


1.21사태 후 폐쇄됐던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고 북악산을 오르는 등산로 2개 코스도 공개됐다. 하나는 칠궁에서 출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 춘추관 뒤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두 코스는 중간 거점 장소인 백악정에서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

칠궁 방향 코스는 전체적인 길이는 좀 더 짧지만 가파른 계단 구간이라 다소 힘에 부치고, 춘추관 방향은 오르막길이지만 계단이 없이 경사가 급하지 않아 비교적 순탄한 편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백악정까지는 약 20분 남짓이면 다다르고, 백악정에서 다시 청와대 전망대까지 약 10분이 소요된다.


백악정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뒤쪽으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올라가는 코스를 지나면 어느 순간 광화문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직선 구간이 나온다. 청와대 아래로 자리한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의 탁 트인 풍경이 반긴다.
올라오는 길이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이 풍경을 보기 위해 1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서울의 새로운 조망 명소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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