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로이드 카메라
2023.04.23 05:00
수정 : 2023.04.23 11:45기사원문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다." "늘 약간 흐릿해서 좋다." "쉽게 구겨지지 않아서 좋다.
영화 '접속'(1997년)에서 주연배우 한석규와 전도연이 PC통신에 접속해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각각 '해피엔드'와 '여인2'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좋다고 한 물건은, 다름 아니라 즉석 카메라의 대명사 '폴라로이드'다.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폴라로이드는 영화 주제곡으로 쓰였던 사라 본의 노래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미국의 폴라로이드사가 세계 최초의 즉석 카메라를 처음 선보인 건 1948년이다. 사진 촬영에서 현상·인화까지 최소 이틀은 걸리던 시절에 단 1분만에 즉석에서 사진이 만들어져 나온다는 사실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셔터를 찰칵 누르자마자 사진을 자동으로 뱉어내는 폴라로이드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발명품이자 신기한 마술과도 같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국내에 이 카메라가 수입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978년 대한전선이 처음 폴라로이드 수입을 시작했지만 대중적인 보급이 이뤄진 것은 1987년 ㈜선경(지금의 SK)이 공식 수입을 맡으면서부터라고 보는 게 맞다. 영화 '접속'에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600'이나 일본 영화 '러브 레터'에 나오는 '폴라로이드 SX-70', 일종의 보급형 모델이었던 '폴라로이드 원스텝' 등이 이 시절 주로 팔렸던 제품이다.
그러나 폴라로이드는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폴라로이드의 강점은 사진을 찍자마자 바로 볼 수 있는 즉시성에 있었는데, 촬영에서 저장까지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은 폴라로이드의 이런 장점을 일시에 무너뜨려버렸다. 결국 2001년 처음 파산신청을 한 폴라로이드는 2005년 한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2007~2009년 카메라와 필름의 생산을 순차적으로 중단했다.
그랬던 폴라로이드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건 모든 것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이 지닌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폴라로이드는 지난 2017년 '임파서블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투자 그룹이 상표권과 지적재산권을 모두 인수하면서 끊겼던 명맥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또 소량이지만 여전히 인터넷 사이트에선 폴라로이드를 포함한 즉석 카메라가 팔려나가고 있고, 손때 묻은 옛날 모델들은 카메라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