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별력 이유로 공교육 죽이는 '킬러'… 학원, 앞다퉈 공포마케팅

      2023.07.11 18:05   수정 : 2023.07.11 18:05기사원문
정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른바 '킬러문항'으로 불리는 초고난도 문제를 퇴출시키기로 하면서 곳곳에서 교육정책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했던 '킬러문항'은 그 자체가 학원들의 마케팅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사교육비 증가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사교육비는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역대 최대(26조원)를 기록했다.

잘못된 교육당국의 입시정책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 지상주의'도 한몫했다는 평가다. 사교육비 지출은 순기능보다는 소비침체 등의 역기능이 더 많다.
이에 본지는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부담을 줄일 대책을 집중 조명해본다.


정부가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선 '킬러문항'을 죽이기로 했다. 변별력을 갖추기 위한 초고난도 문제가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키운다는 지적이 커졌기 때문이다. 킬러문항이라는 용어는 2010년대 초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배점 큰 문항이 킬러문항으로 출제되면서 이 문제의 정답 여부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킬러문항은 입시학원의 마케팅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아왔다. 다만 킬러문항이 탄생한 배경이 정부의 교육정책 실패라는 점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큰 상황이다.

■변별력 목적인데 과도한 추론 요구

11일 교육계 등에 따르면 킬러문항은 단순히 시험에서 변별력을 갖추고 수험생을 평가하기 위해 출제한 문제가 아닌, 의도적으로 문제를 꼬아 '헷갈리고 어려워하라고 만든 문제'라는 평을 듣는다. 공교육 과정에서 충분히 배우지 않은 개념을 이용해 풀어야 하는 킬러문항도 존재한다.

따라서 입시업계에서는 킬러문항의 정답률을 10% 이내로 보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대학교 선행학습을 하지 않을 경우 풀이가 불가능한 문제들이다.

교육부가 제시한 킬러문항의 기준은 고차원적 접근방식, 추상적 개념 사용, 과도한 추론 필요 등이다. 실제 교육부는 사교육 경감대책을 발표하면서 최근 3년간 수능과 올해 6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모의평가에서 출제된 문항 가운데 총 22개의 킬러문항을 가려냈다.

과목별로 국어는 "고교 수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문이 출제되거나 배경지식이 있어야만 빠르게 풀 수 있는 문항"을 킬러문항으로 꼽았다. 교육부가 예로 든 문항 중엔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도 있다. 원고지 9개 분량의 '비문학(非文學)' 원고에 기초대사량의 개념, 기초대사량 도출방법 등을 거론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교육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과학과 수학분야 내용을 다루는 어려운 지문을 제시해 국어 독해력보다는 배경지식 차이와 수학적 이해능력이 문제 해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각 문단의 내용을 연결해 이해해야만 하는 과도한 추론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학원, '공포 마케팅' 한 것"

킬러문항 등장에 가장 먼저 대응하고 이용한 곳은 입시학원이다. 특히 한 문제 차이로 입시 결과가 갈리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킬러문항 맞히기에 열중하면서 킬러문항 마케팅이 성행했다.

대치동의 한 업체는 수능 출제위원 출신 경력을 내세우며 킬러문항 대비용 수능 모의고사 문제를 만들어 팔았다. 또 킬러문항에 집중한다고 홍보하며 강좌를 추가로 열어 수십만~수백만원대의 금액을 교재비와 수강료로 받는 입시학원도 있었다. 더구나 수능 킬러문항이 입시학원에서 사용한 모의고사 문제와 상당히 유사한 일도 있었고, 입시학원은 이를 홍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킬러문항 문제집을 따로 만들어 월 100만원씩 받고 판매한 입시학원도 있었다. 먼저 대응한 만큼 입시학원은 최대 수혜자도 된 것.

서울 노원구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원장 A씨는 "킬러문항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강남 학원가가 마케팅에 치열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사교육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포 마케팅'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관련해 교육부는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집중신고기간'(6월 22일∼7월 6일) 운영 결과에 따르면 △사교육 업체·수능 출제체제 간 유착 의혹 50건 △끼워팔기식 교재 등 구매 강요 31건 △교습비 등 초과 징수 36건 △허위·과장광고 54건 △기타 195건 등의 신고가 있었다. 한 개의 신고에 여러 사안이 포함된 경우도 있어 총 366건이 접수된 셈이다.

■교육정책 실패가 원인

이처럼 킬러문항 사태 이후 입시학원이 공공의 적이 된 분위기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교육정책이 실패하면서 킬러문항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근본 배경을 만들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킬러문항이 등장하기 시작한 지난 2010년대 이후 EBS 연계정책과 더불어 수험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며 교육과정과 수능시험 범위, 문항 수를 축소하는 정책이 꾸준히 병행됐다. 따라서 현재 초기 수능과 비교했을 때 수학 과목을 제외한 절대적인 문항 수는 모두 줄었다.

문제는 수능이 수험생의 석차를 나누는 '상대평가'라는 점이다. 교과 과정이 줄고 학생들의 학습 부담 감소와 사교육비 경감이란 정책 목표와 변별력 확보라는 현실이 충돌하게 되면서 범위는 줄었지만 학생들의 학습량은 오히려 느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구나 2018학년도 영어 절대평가로 전환된 이후부터 상대평가로 남아있는 국어, 수학 난이도가 높아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2019학년도 수능의 킬러문항이었던 국어 31번 문제는 만유인력과 관련된 생소한 개념이 나왔다.
이를 놓고 물리학자들도 "국어 문제가 아니라 물리 문제"라고 비판할 정도로 어려웠다. 2019학년도 국어 영역의 표준점수 최고점은 역대 최고인 150점까지 치솟았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의 입시학원 강사 B씨는 "EBS 연계율이 70%로 높아진 시점부터 문제를 꼬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며 "여기다 영어 과목을 '절대평가'로 만들고, 꾸준히 시험 범위는 줄고 있으니 출제자 입장에서 변별력 확보를 위해 틀리라고 킬러문항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wongood@fnnews.com 주원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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