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재판의 추억과 기대

      2024.08.10 09:00   수정 : 2024.08.11 13:51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재판 진행 연습의 필요성

나는 200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17년간 재판 업무를 하다가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치게 되었다. 법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재판 업무를 담당하였지만 아무리 재판 준비를 잘하더라도 재판 당사자의 심정을 100%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재판은 법정이라는 곳에서 재판 당사자가 어떠한 주장을 하고, 그 주장에 대해 재판 당사자들끼리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면 증거를 통해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사실 확정 단계)을 거친 후 확정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법령과 판례를 적용하여 그에 맡는 결론(판결, 결정 및 심판 등)을 내는 과정이다.

그 복잡하고 긴 과정을 하나하나 논리적 순서에 맞게 풀어나가는 것이 재판장이 할 일이다. 재판을 진행함에 있어 재판 당사자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어떤 증거가 제출되었는지 등은 당연히 재판에 앞서 재판장이 숙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와 같은 재판 준비만으로는 좋은 재판이 될 수 없다. 아무리 기록을 잘 숙지하고 있어도 재판 당사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재판장은 미숙한 재판장이 된다. 예를 들어 법정 내에서 마이크 사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재판 당사자는 재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한다. 또한 말이 너무 빨라도 그렇다. 나아가 마이크 사용을 제대로 했더라도 재판 당사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기록만 보면서 재판을 진행한다면 재판 당사자들의 절차적 만족감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재판 기록의 숙지 못지않게 소통 기술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재판 당사자들에게 명확하게 의사 전달이 될 수 있도록 호흡과 발성 연습도 필요하고, 자연스런 눈 맞춤도 연습도 필요하다. 그냥 본인이 편한대로 습관대로만 진행하다보면 재판 절차 진행은 점점 더 부자연스럽게 변할 것이다. 나의 경우 예전에 방송을 한 경험이 있어 발성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재판 진행 중 기록을 자주 보는 습관이 있었고, 재판 당사자의 발언 시 눈맞춤 시간이 너무 짧았던 문제점을 발견하고 나서는 이를 고치기 위해 사무실에서 혼자 재판 진행을 연습해 보기도 했었다.

간접경험의 한계
이러한 재판 진행 연습이 빛을 발했던 때가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재판·소년재판 업무를 담당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부끄럽지만 2020년 경기지방변호사회로부터 우수법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정법원은 다른 법원과 달리 재판 당사자들에 대한 법원의 후견적·복지적 기능이 꼭 필요한 법원이다. 사실 간접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혼인 기간을 거쳐 결혼 생활이 가져다주는 행복, 책임감 및 고단함 등 각종 희노애락을 겪어 보아야만 가정법원에서 다루는 특수한 사건들의 내용 그리고 그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리지 스토리(Marriage Story)란 영화를 보면 이혼을 경험한 여자 변호사가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여성에게 상담을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은 그 변호사 역시 이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속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오픈하게 된다. 주인공 남성 역시 중간에 등장한 4번의 이혼을 겪은 새로운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야 이제야 정말 자신의 상황을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고 안도한다. 가정법원에서 다루는 이혼사건, 상속재산분할심판, 후견사건, 가정보호사건, 아동보호사건 및 소년심판 등은 법률이 적용되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 이외에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부분이 다른 재판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법 이론은 이해하고 적용하면 그만이지만 감정을 다루는 영역은 공감을 느낄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차이가 크다. 그런 면에서 아동보호재판은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판사가, 소년재판은 청소년기 이상의 자녀들을 두고 있는 판사가, 가정보호재판은 적어도 배우자와 2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해본 판사가 재판장으로서 적합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소년재판의 단상
소년부 판사가 2명밖에 없었던 2019년 수원가정법원의 경우 한 해에 소년재판 사건만 6000건이 넘었으므로 소년부 판사 한 명당 1년간 300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따라서 소년부 판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들에 등장하는 비행소년들이 처한 상황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 아이들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했다. 다만 소년부 판사로서 그 소년에 대한 조사, 처분 및 집행감독을 통해 그 소년의 인생에 일정한 방향을 설정해 줄 수는 있었다. 일단 각 비행소년에게 알맞은 길(Path)을 선별하여 주고, 실제 소년이 그 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는 보호자, 위탁보호위원, 6호 시설 또는 소년원 등 각 집행기관이 확인하고 도와줘야 했었다. 만약 그 길이 그 비행소년에게 맞지 않는 경우 소년부 판사는 직권으로 또는 관계기관의 요청으로 처분변경을 통해 비행소년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곤 했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소년부 판사가 소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비행소년 및 보호자도 소년부 판사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비행소년과 보호자의 신뢰는 법정에서 소년부 판사가 보여주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너무나 많은 사건 수 때문에 결국 시스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판사라 해도 소년재판을 함에 있어서는 항상 적극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재판을 받는 소년들과 보호자들은 판사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여러 병원을 다니다 보면 환자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형식적인 진료를 하는 의사들을 가끔 보게 된다.
그때의 불편한 마음을 알았기에 나는 소년재판 진행 당시 짧은 시간이더라도 항상 법정에 선 비행소년과 보호자의 눈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비행소년이나 보호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더라도 일단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주었다.
아직까지 소년재판 사건을 수임하여 보조인으로 법정에 서 보지는 못했는데 훗날 소년재판 사건을 맡게 된다면 따뜻하고 열린 마음의 재판장을 만나고 싶다.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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