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독서인을 위한 변명

      2024.10.23 18:24   수정 : 2024.10.24 08:01기사원문

비가 그친 가을은 더 청명하다. 법정(1932~2010)은 가을이 책 읽기에 가장 부적당한 '비독서지절'이라고 했다. 이토록 맑고 푸르른 가을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은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라고 했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무소유' 중에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진다. 빠르게 상실해 가는 우리의 독서력에 대한 물음이 그중 하나다. 우리나라 성인의 60%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비독서인이다(2023년 종합독서율 43%). 30년 전보다 3배나 늘었다. 이른바 '독서상실' 시대.

왜 이렇게 됐을까. 책보다 더 재미있는 지적 쾌락의 수단이 많아졌다. 스마트폰이다. 무한정 증폭적으로 공급되는 숏폼은 호기심과 쾌락을 즉각 충족시킨다. 도파민을 얻기가 독서만큼 멀리 있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 책 읽기는 숏폼과 영화, 드라마와 같이 수동적 흡수와 다르다. 스스로 읽고 이해하는 능동적 뇌 활동이다. 인내도 따른다. 그러니 "일에 쫓겨, 스트레스가 많아, 시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한다"는 고단한 현대인의 변명이 과장도 아닐 것이다.

독서의 동인(動因)이 사라지고 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인공지능(AI)이 놀라운(?) 독서감상문을 써주는 세상이다. 책을 요약해 알려주는 유튜브 영상도 차고 넘친다. 소설 읽기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깊은 통찰을 이끌어주는 힘이 된다. 몇 분짜리 요약본으론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지혜가 있다. 성취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시간·인내와 비례한다. 독서는 빈부와 계층을 가르지 않는다. 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고전은 우리 정신의 그릇을 뽀갠다. 거대한 존재를 마주하는 경험이다. 전보다 큰 정신의 그릇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경쟁에 내몰린 10대 청소년들은 책과 더 멀어졌다. 대입전형 학생부에 독서활동 기재가 폐지되자 책 읽기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붕괴돼 가는 공교육은 아이들 독서를 권장하고 포용할 힘조차 잃어가고 있다. 자살 충동과 폭력·도박·마약과 같은 중독에 아이들은 더 허약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 대신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독서를 권장하는 프로그램조차 사라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책의 본질은 읽기 위함이다. 독서인을 위한 배려는 사라졌다. 책은 과하게 고급스러워졌다. 무겁기까지 하다. 겉포장이 화려한 고가의 양장본이 넘쳐난다. 책도 유행이고 상품인지라 과시·소장 욕구가 있을 것이다. 고물가에 1만원으로 살 수 있는 책이 별로 없을 정도로 가격은 상향 평준화됐다. 출간 수년이 지난 책의 표지를 리뉴얼해 가격을 올리기도 한다. 포장이 멋져야 잘 팔리기 때문이다. 박리다매가 어려운 구조에서 종이 값, 인건비도 올랐다. 이렇게 제작비를 회수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출판업계의 하소연도 이해는 된다.

책값은 가격할인 10%로 제한된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가 적용된다. 20년째 그렇다. 책이라는 문화상품의 특수성, 중소서점과 소규모 출판사의 생존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도서정가제의 취지는 존중한다. 그러나 소비자이자 독서인은 어떤 편익을 얻고 있을까. 한강의 책이 며칠 새 100만부 넘게 팔렸다. 주문의 90% 이상을 국내 3대 대형서점 플랫폼이 점유했다고 한다. 책을 못 구한 동네서점은 그림의 떡이다.
소수 플랫폼의 이익을 정가제가 보호하는 꼴 아닌가.

독서 상실이 깊어지는 현실에서 소비자와 출판업계의 간극은 더 커졌다. 가격경쟁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도서정가제와 '과잉 출판'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개선이 필요한 때다.
비독서인이 책과 영영 작별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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