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공유·서현진 ‘트렁크’와 샹들리에

      2024.12.04 16:08   수정 : 2024.12.05 08:44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사랑과 폭력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서 김려령이 드러낸 결혼과 사랑의 맨얼굴”(트렁크 출판사 창비).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기간제 결혼이라는 발칙한 소재와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를 시발로 살인사건 이면에 숨겨진 네 남녀의 복잡한 심리를 들여다보는 멜로드라마다.

드라마 자체는 두 남녀가 기간제 결혼을 계기로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위로하고 구원받게 된다는 내용이나 그 과정에서 가정 폭력, 스토킹, 잠수이별, 가스라이팅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등장인물의 삶을 짓누르며 그들 관계에 영향을 준다.

두 아이를 둔 보통의 가정부터 다양한 형태의 남녀 관계, 결혼·임신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취하는 개개인이 이 드라마의 구성원으로 등장한다.



현대인의 고독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주인공은 배우 공유와 서현진이 주연한 한정원과 노인지다. 지하 주차장에 명품차가 즐비한 부유한 음악 프로듀서 한정원(공유)은 약 없이는 하루도 잠들지 못할 만큼 정신 상태가 위태위태하다.
어릴 적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면서도, 끔찍한 기억으로 가득한 집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의 지독하게 고독한 모습은 마치 고도 성장 속에 삶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황폐해진 한국사회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언뜻 보이기도 한다.

결혼 직전 복잡한 사정이 있는 남자친구의 잠적으로 파혼한 노인지(서현진)는 우연한 기회에 VIP 기간제 결혼 서비스 회사에 취직한다. 관계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전 남친을 고집스럽게 기다리는 그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로 인해 일상이 불안하다. 하지만 회사에선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다섯번째 남편으로 한정원을 만난다.

한정원의 전처 이서연(정윤하)은 유산을 계기로 한정원과 이혼한 뒤 기간제 결혼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미련이 큰 전남편 한정원에게도 기간제 결혼을 강요한다. 한정원은 전처와 재결합을 위해 마지못해 노인지와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서현진은 앞서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작품 이미지가 좋았다”고 밝혔는데,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쓴 이 멜로드라마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완성됐다. 고독과 불안이 드라마의 주된 정서다.

‘우리들의 블루스’, ‘괜찮아, 사랑이야’, ‘라이브’,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을 만든 김규태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음악과 색채, 상징을 활용한 독특한 연출로 극중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한다.


이를테면 노인지는 붉은색, 이서연에겐 푸른색을 부여했다. 빛과 어두움, 직선과 곡선 등을 대비시키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의상과 소품 배치의 디테일 역시 공을 들였다.

김 감독은 넷플릭스를 통해 “‘트렁크’의 큰 축은 ‘멜로’와 ‘미스터리’다. 이야기의 방식이나 방향성이 원작과 완전히 다른 톤으로 각색됐다. 특히 멜로적인 감성, 미스터리 구조 등이 확정되고 증폭됐다”며 “시청자들이 끊임없이 질문하고, 감정적 심리전을 유도하는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트렁크와 샹들리에, 아름답지만 폭력적인..결국 사랑

트렁크와 샹들리에는 이 작품의 주요 소품이다.

이 작품은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네 남녀의 비밀스러운 결혼서비스의 내막이 밝혀진다.

가격이 5000만원에 달하는 명품 트렁크의 주인은 한정원의 아내. 전 부인 이서연과 재혼한 노인지는 공교롭게 같은 트렁크를 구매했다.

노인지에게 트렁크는 업무 도구다. 그는 마치 여행을 하듯, 새 결혼을 할 때마다 이 트렁크를 끌고 다닌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정착하지 못한 노인지의 상태를 대변한다.

반면 이서연은 이혼한 뒤에도 전 남편의 옷장에 자신의 트렁크를 놔둔다. 몸은 재혼한 남자 곁에 있지만 마음은 전남편에게 있는 그의 상태를 드러낸다. 또한 트렁크 안에는 남들, 특히 자신의 남편에겐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출산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 등이 꽁꽁 숨겨져 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샹들리에는 우리사회가 흔히 말하는 사랑·결혼의 아름다움과 닮았다. 동시에 이 소품은 한정원의 비극적 가정사를 지켜본 CCTV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한정원을 가스라이팅하면서 제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은 이서연이 전 남편의 일상을 훔쳐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샹들리에에 대해 언급하는 한정원과 노인지, 이서연의 대사는 세 사람의 성격과 상태,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한정원에게 샹들리에는 어릴 적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다. 그는 샹들리에를 외면하고 이를 교체하길 원한다.


이서연은 기존 샹들리에를 빨리 치워달라는 전남편의 요구에 프랑스에서 공수한 샹들리에가 오기까지 놔두라고 지시한다. 그에게 이 물건은 희소성이 있는 값비싼 인테리어 소품이다.

반면 노인지는 샹들리에를 쳐다보기 두려워하며 외면하는 한정원의 마음을 곧바로 눈치챈다. 그는 기존 샹들리에를 회수해 가는 전처 이서연의 태도를 못마땅한 듯 지켜보다 고물상에 단돈 3000원 주고 팔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한정원은 그 말을 듣고 최소 3000만원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응수한다. 이는 어릴 적부터 폭력에 길들어진 한정원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상황과 환경에 둔감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히려 노인지는 자신의 기간제 남편에게 상처를 준 그 물건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노인지와 한정원의 멜로는 이런 식이다. 대놓고 서로를 이해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만히, 천천히, 행동으로 서로를 위하고, 위로하고, 구원한다.

김 감독은 “이미지∙상징적으로 가장 중점을 뒀던 정원의 집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트렁크와 샹들리에라는 핵심적인 오브제를 어떻게 영상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며 “미술 감독님께서 과감한 톤을 제시해 줬다. '트렁크'의 비주얼 이미지는 ‘세트가 다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또 “미스터리를 증폭하고 긴장을 유지하는 데에는 음악과 음향, 편집이 큰 역할을 했다”며 “음악에서는 기묘함∙관능성∙파격성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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