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은 벤처캐피털도 못 하나
파이낸셜뉴스
2018.08.05 17:23
수정 : 2018.08.05 17:23기사원문
'금산분리 벽'에 가로막혀 구글·애플 등 미국과 대조
정부가 대기업 벤처정책을 일부 손질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주 혁신성장관계장관 회의에서 현행 벤처지주사 제도 개선안을 내놨다. 대기업이 벤처지주사를 세울 때 필요한 자산은 500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낮췄다.
벤처지주사를 대기업집단으로 편입시키는 기간은 7년에서 10년으로 늦췄다. 대기업들은 자금이 넉넉한 편이다. 반면 벤처는 늘 돈이 부족하다. 이 둘을 잇는 게 개선안의 목표다. 개선안은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 담겨 올가을 정기국회에 제출된다.
혁신성장에 발동을 걸려는 정부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개선안이 축 처진 벤처 생태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애초 재계는 벤처지주사를 조금 손질할 게 아니라 아예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Corporate Venture Capital)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컨대 SK·LG·롯데 등 대기업 지주사들이 자회사 CVC를 통해 될성부른 벤처에 마음껏 투자할 수 있게 길을 터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소는 금산분리 철벽에 부닥쳤다. 현행법상 CVC는 금융사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절충안으로 나온 게 바로 벤처지주사 개선안이다.
벤처지주사 제도는 외환위기 직후인 2001년에 김대중정부가 도입했지만 지난 17년간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그만큼 대기업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공정위에 당부한다. CVC 허용안을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담아서 국회에 제출하기 바란다. 허용할지 안 할지는 국회에 맡기면 된다. 국회에 바란다. 인터넷은행과 함께 CVC에 대해선 금산분리 규제를 예외적으로 풀어주길 바란다. 정치인들은 재벌이 금고에 사내유보금을 쌓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발상을 바꿔서 재벌이 돈을 펑펑 쓸 수 있게 길을 터줄 생각은 왜 안 하나.
미국은 '창업-성장-회수-재창업'으로 이어지는 스타트업 생태계가 아주 건강하다. 구글, 애플, 아마존은 좋은 벤처가 나오면 과감하게 인수한다. 지분을 팔아 떼돈을 번 벤처는 재창업에 나선다. 심지어 사회주의 중국도 이와 비슷한 창업 생태계를 유지한다. CVC를 틀어막고 혁신성장을 말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