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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꽁트 ]마흔살 여자의 23인치 허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7.05 04:45

수정 2014.11.07 14:02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오직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결혼 서약을 진실로 지키며 한평생을 사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결혼할 즈음,나와 남편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손도장까지 찍으면서 몇 가지 약속을 했다.‘둘의 의견이 일치되면 땅 같은 여자 뜻대로,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면 하늘같은 남자 뜻대로 하자’라는 무지무지한 불평등의 조약도 맺었다.‘둘의 허리둘레 합이 60인치를 넘지 않도록 하자’ 라는 말도 안되는 세부조항도 있었다.

나는 어리고 순진한 처녀였던 만큼 세상의 물정에 무지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집이 가고 싶어서 온몸이 꼬일 지경이었다.그때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나는 고생과 설움의 전주곡인 줄도 모르고 시집갈 욕심에 그 사나이의 어떤 제안도 받아들였다.

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약속은 지켜야한다고 교육받고 자란 뼈대있는 가문의 딸이다.그래서 남편의 허리둘레가 1인치 늘어날 때마다 내 허리둘레를 1인치 줄이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 허겁지겁 먹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니까.우아하게…” 저녁식사 시간에 남편에게서 내가 자주 듣는 말이다.

“그렇게 먹고 뚱뚱 아줌마되면 조용히 짐싸서 나가는거 알지?” 남편은, 듣는 여자로서는 자살하고 싶으리만치 모욕적인 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다.

여자 앞에서 눈만 치켜 떠도 간 큰 남자라는데 이 남자는 간뿐만 아니라 내장이 모두 배 밖으로 산책나온 것 같다.

내 식사 습관이 원래 ‘ 마파람에 게눈 감추기’ 식은 아니었다.나는 어떤 단어보다도 ‘ 우아’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우아한 머리모양과 화장과 옷차림을 지향하고,밥도 우아하게 먹고 커피는 더욱 우아하게 마시고 우아하게 걸으려고 노력한다.골프도 잘 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윙 폼을 만드는 데 더 신경을 쓴다.그런 내가 허겁지겁 먹는다는 핀잔을 듣게 된 까닭은 다름 아닌 골프 때문이다.

뜨거운 우거지 해장국을 입천장을 데면서 단숨에 들이켜고,가슴을 쳐가며 찐 오리알을 통째로 삼키고,얼음이 둥실 뜬 냉면 한 사발을 면발 끊을 새도 없이 쭈욱 빨아들이는 훈련을 10년 넘게 했더니,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습관이 몸에 익어버렸다.어렸을 적에 귀에 더께가 앉도록 들은 어른들의 말씀대로,입안에 들은 음식을 50번 이상 꼭꼭 씹어먹다가는,후딱 먹으라는 캐디의 재촉과 얼른 나가라는 뒷조의 눈총에 오늘까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급골프장에서 한 번의 라운드보다 퍼블릭코스에서 두 번의 라운드를 실리적이라 계산했던 나는,몰이꾼이 토끼를 추격하듯 골퍼를 몰아대는 골프장에서 음식을 빨리 먹는 극기훈련까지 덤으로 받아야 했던 것이다.더구나 6,7 ㎞의 산길을 카트를 끌고 오르내리다 보면 배가 훌쭉하게 꺼져 그늘집에서 파는 만두건 떡국이건 짜장면이건 다 꿀맛임을 어찌하랴.그 식사법이 몸에 배어버렸음이 죄라면 죄다.

60에서 36을 빼면 24요,37을 빼면 23이다.아이를 둘이나 낳은 나이 40이 넘은 여자의 허리에서 23인치라는 수치가 나올 수는 없다.아마도 남편은 수 년 동안 아무리 졸라매도 줄어들지 않는 자신의 허리통에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마누라라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그런 충격적 요법을 쓰는 것일까.

/김영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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