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대한투신 한국투신에 공적자금 추가투입으로 일단락된 투신업계 구조조정 작업의 효과는 아직 기대하기 요원한 가운데 국내 투신산업은 펀드매니저들의 주가조작 연루사건으로 불거진 모럴헤저드,고객을 무시하는 경영풍토,파행적인 펀드운용,증시침체 등으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선진 운용기법으로 무장한 외국계 투신사들이 700조원에 달하는 개인금융자산 시장을 노리고 하나 둘 한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어 국내 투신업계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국내 투신업계가 과거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선진 간접투자시장에 버금가는 새 패러다임을 형성하기를 기대하면서 투신업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차례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국내 투신사의 펀드매니저 한 명이 운용하는 펀드수가 평균 45개나 돼 부실한 펀드운용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국내 투신업계에 존재하는 펀드수는 1만3000개 이상으로 세계 최대지만 열악한 운용환경속에서 펀드를 재대로 운용할 펀드매니저는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펀드수가 많다보니 효율적인 수익률 관리에 구멍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펀드간 부당편출입,고객에 대한 차별적 대우,잦은 펀드매니저 교체 등 파행운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병폐를 안고 있다.
본지와 한국펀드평가가 21일 현재 올해 신설된 투신사를 제외한 24개 투신사들을 대상으로 각 사별 펀드수와 실제 펀드를 운용중인 펀드매니저수를 조사한 결과 펀드매니저 1인이 운용하는 펀드수가 평균 44.9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형 펀드의 경우 전체 5594개 펀드에 운용 펀드매니저는 166명으로 한 명의 펀드매니저가 평균 33.7개의 펀드를 관리하고 있다.채권형은 더 심각해 117명의 펀드매니저가 총 7124개의 펀드를 굴려 1인당 운용하는 펀드수가 평균 60.9개에 달했다.
투신업계에서는 대우채 펀드 등 실제 운용은 되지 않고 미매각 상태로 남아 있는 펀드가 수천개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감안하더라도 외국의 사례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1명이 펀드 200개 이상 운용하기도=24개 투신사 중 펀드수가 가장 많은 투신사는 대한투신운용으로 전체 펀드수가 2474개에 달한다.그러나 실제 운용에 참가하고 있는 펀드매니저는 27명에 불과해 한 명당 90개가 넘는 펀드를 운용해야 하는 형편이다.운용하는 펀드를 한번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한국투신운용의 펀드매니저들도 1인당 주식형 45개,채권형 56개 펀드를 운용하고 있고 현대투신도 각각 31개(주식형),65개(채권형)에 달했다.삼성투신 제일투신 등 다른 투신사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펀드매니저가 관리하는 펀드수가 지나치게 많기는 마찬가지였다.그나마 최근들어 펀드수가 줄고 있는 추세여서 부담이 줄어든 게 이정도다.
게다가 운용경력이 3∼4개월에 불과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펀드매니저가 직접 고객의 돈을 굴리고 있는가 하면 H투신 S투신 D투신 등의 경우처럼 사실상 간판급 펀드매니저 1∼2명이 거의 모든 펀드의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실태가 다반사다.
◇펀드유형·운용스타일 무시=각 펀드의 특성이나 펀드매니저의 전공분야는 전혀 무시되고 있다.펀드 유형이 다르면 운용방식도 달라야 하고 펀드매니저마다 운용스타일이 제각각이게 마련이지만 펀드수는 많고 사람은 없다보니 이를 고려할 여유가 없는 실정이다.
주식형의 경우 1년미만의 단기펀드는 탄력적인 시장대응이 필요하고 장기펀드는 안정적인 수익률관리가 이뤄져야 한다.필요한 운용방식이 다른 만큼 펀드매니저도 달라야 하지만 투신사에 따라서는 한 명이 모두 관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채권 펀드매니저도 단기상품인 MMF,장부가펀드,시가형펀드를 간판급 매니저 한 명이 동시에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 사장은 “외국의 경우 한 명의 펀드매니저가 한개의 펀드를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여러 펀드를 동시에 운용하는 경우도 3∼4개를 넘지 않으며 불가피한 경우 같은 유형의 펀드일 경우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펀드 파행운용 불가피=한 펀드매니저가 여러 펀드를 동시에 관리하다 보니 펀드운용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소수의 주력펀드의 수익률에 신경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펀드매니저의 관심에서 소외되는 펀드가 생길 수밖에 없다.
H투신의 펀드매니저를 지낸 한 직원은 “한 때 100개 이상의 펀드를 운용했지만 계속 신경을 쓸 수 있는 펀드는 극소수”라며 “1000억원이상의 대형펀드와 기관들이 투자한 전용펀드의 수익률을 관리하기도 벅차다”고 털어놨다.
개인투자자들이 주로 투자한 공모펀드의 경우 수익률이 떨어져도 몇 번의 항의를 받는 것으로 그치지만 기관투자가의 전용펀드와 가입자가 50인 이하인 사모펀드는 고객의 요구가 많고 까다로워 아무래도 신경을 더 쓰게 된다는 고백이다.
다른 투신사 한 현직 펀드매니저는 “여러 펀드를 관리하다 손실이 발생하면 기관 전용펀드나 사모펀드에서 발생한 손실을 일반펀드에 전가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예를 들어 공모펀드인 A펀드와 전용펀드인 B펀드를 합쳐 삼성전자 10억원어치를 샀으나 그날 주가가 내려 1억원을 손해봤다면 10억원 전체를 공모펀드 A에 편입시키는 식이다.
워낙 많은 펀드를 관리하다보니 한 펀드매니저가 운용한 펀드중에 업계 최고의 수익률을 내는 펀드와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한 펀드가 동시에 존재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한다.
한국펀드평가 우 사장은 “외국에서는 동일 펀드매니저가 운용하는 펀드간에 수익률 차이가 발생할 경우 수익률이 낮은 펀드의 가입자들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며 “펀드수는 너무 많고 펀드매니저는 너무 적은 것이 이같은 파행운용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펀드수 줄이는 게 급선무=업계 전문가들은 우선 급한 대로 우후죽순으로 널려 있는 펀드수부터 획기적으로 줄여 놔야 한다고 진단했다.
금감원과 투신사에서 휴면상태에 있는 자투리 펀드를 정리해 투신사별 500개 이내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중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한 투신운용사 임원은 “무리한 고객 유치 경쟁으로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같은 쌍둥이 펀드들을 양산했다”며 “대형투신사라도 30∼40개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펀드매니저 양성과정도 수술이 불가피한 것으로 지적됐다.
알리안츠 생명보험 이원일 이사는 “자격시험으로 펀드매니저를 뽑는 국가는 세계에서 우리나라 뿐”이라며 “투신사 내에서 몇년간의 수련을 거쳐 능력이 검증된 사람 위주로 펀드매니저를 선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 jgkang@fnnews.com 강종구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