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각대상으로 올라 있는 대우차 및 쌍용차 본사, 해외생산법인 11개사와 판매법인 25개사는 전세계 217만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자동차 제국이다.그러나 이 거대 제국은 지난해 8월말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대우차 몰락의 주요인으로 현대·기아차와 다른 초국적자본의 강한 영향, 기업경쟁력 축적의 미흡 그리고 이를 단숨에 만회하기 위한 무리한 규모확대 위주의 전략을 지적한다.
◇GM과의 20년 결혼생활이 부실의 발단=전문가들은 양사간 제휴관계로 인해 대우차가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제품도 열악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대우는 지난 78년 산업은행이 보유하던 새한자동차 지분 50%를 인수하며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그러나 70년대 기아차가 최초의 종합자동차공장인 소하리공장을 지어 엔진 국산화에 성공하고 현대차는 여기에서 한보 더 나아가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했다. 대신 대우차는 지난 82년 GM의 월드카였던 오펠의 ‘카데트’를 들여와 ‘르망’ 신공장(현재 부평2공장)을 신축하고 85년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대우차 관계자는 “당시 GM은 2000년 한국 자동차 내수시장 규모를 30만대 수준으로 전망할 정도로 극히 보수적인 입장이었다”면서 “이에 따라 대우차와 GM간 협력관계에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대우차는 91년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했고 김우중 전회장은 92년 GM과의 결별을 선택했다.그러나 고유모델과 독자엔진이 없는 상태에서 대우차의 고전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성재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연구위원은 이와관련, “대우차는 당시 무이자할부판매와 밀어내기식 수출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며 “매출채권이 산더미처럼 쌓여 유동성 위기와 대손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설명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외줄타기 곡예’였다=김 전회장은 지난 93년 3월 ‘세계경영’을 선언했다.또 해외시장에 200만대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구축,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경우 그동안의 손실을 모두 만회해줄 것으로 기대했다.이에 따라 90년대 중후반 대우차는 해외현지법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일으킨다.그러나 하나의 투자가 회임된 후 순차적으로 다음 투자를 진행하는 안정적 전략이 아닌 너무 짧은 기간에 투자를 집중함으로써 큰 위험성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우가 진출한 지역은 폴란드·체코·루마니아 등 동유럽과 인도·베트남 등 아시아에 편중됐다.개도국 시장이 어느정도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간과한 채 대우의 ‘세계경영’은 수익성을 도외시한 양적 성장 위주의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최근 폴란드 FSO공장을 제외하면 해외 공장들의 가동률은 30%에도 미치치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경쟁기업들은 많은 의문과 불안감을 표시했다.그 많은 돈을 어디서 조달했는가. 또 생산제품은 어디에다 팔 것인가.대우차의 또 다른 관계자는 “당시 대우의 현지법인들은 국내에서 자금을 차입해 자본금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현지금융 등을 이용한 총체적인 차입경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김 전회장을 제외하고는 자금조달경로를 아는 이가 전혀 없어 합리적인 견제 수단이 전무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자동차는 생산·판매 외에 연구개발투자(R&D)·부품산업 육성·애프터서비스 등이 중시되는 소비재”라고 전제한 뒤 “당시 대우차는 ㈜대우 인력이 고위직을 차지하며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어 생산 및 판매외의 다른 주요부가 기능은 무시됐다”고 아쉬워했다.결국 무모한 신화창조는 97년 전세계적으로 찾아온 외환위기와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이다.
/ js333@fnnews.com 김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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