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5∼16일 양일간 브루나이의 수도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8차 정상회담이 열린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모리 요시로 일본총리,장쩌민 중국 국가주석,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 등 한반도 주변 4강의 정상이 자리를 함께 하는 이번 회담에서는 특히 일본의 주도로 아시아판 자유무역협정(FTA)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 그동안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상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쌍무 혹은 지역별 FTA로 통상정책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세계인구의 40%가 거주하며 세계경제의 절반 이상을 떠맡고 있는 APEC권의 FTA 추진은 그간 역내 양대 경제대국인 미국·일본이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거나 못함에 따라 본격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온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계에 봉착한 일본 경제 구조조정의 돌파구와 경제재생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본정부는 지난달 22일 싱가포르와 포괄적인 FTA 협상을 오는 2002년 말까지 완료키로 합의한 데 이어 한국,멕시코 등과 교섭을 준비하는 등 FTA와 관련해 종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APEC 정상회담에 즈음해 일본의 FTA 전략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 글 싣는 순서
(상) 일본 통상정책의 방향전환
(중) 일·싱가포르 FTA
(하) 한·일 FTA와 일본의 본심
“스포츠 부문에서 일본 신기록을 아무리 경신해도 세계기록을 내지 못하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도 세계적인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최근 도쿄 시내 게이단렌(經團連)회관에서 열린 ‘자유무역협정(FTA)과 일본의 선택’ 심포지엄에 참가한 아라이 히사미츠(荒井壽光) 통상산업심의관은 “세계는 국가간 제도경쟁에 들어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최근 일본정부가 FTA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를 통해 국내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심포지엄은 일본 게이단렌과 외무성·대장성·통상산업성이 공동주최했으며 대학교수와 국회의원이 연사로 참가하는 등 민·관·학·정이 FTA와 관련한 합의를 형성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각국 대사관 관계자와 학계·재계·관계 등 150여명이 참석한 이날 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은 “FTA가 세계경제의 메가 트렌드(거대 흐름)이며,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일본으로서도 다자간 무역체제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해야 한다” 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일본정부가 공식문서로서 FTA에 긍정적인 자료를 낸 것은 지난해 5월 들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 일본정부는 특정 국가들끼리의 자유무역협정은 경제 블록화를 초래하기 쉽다면서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시하는 통상정책을 고수해 왔다.
특히 지난해 말 시애틀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가 각국의 이견만을 노출시킨 채 세계화 반대 시위에 부닥쳐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다자간 자유화 협상의 한계를 실감한 것이 통상정책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일본이 WTO를 고수하고 있는 사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120개 이상의 쌍무 혹은 지역 자유무역협정이 구성돼, 주요국 가운데 FTA협정을 전혀 맺지 않고 있는 나라는 일본·중국·한국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일본 정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일본 재계와 산업계도 정부의 통상정책 변화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게이단렌은 지난 7월 발표한 ‘자유무역협정의 적극적인 추진을 바란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국제적인 통상 시스템은 다국간주의와 지역주의가 공존하는 새 시대에 들어섰다”고 강조했다.
게이단렌은 일본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로 이 협정이 상대국·지역과의 비즈니스 기회를 늘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며, 미·유럽의 자유무역협정 강화로 상대적으로 자국 기업들이 불이익을 입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역내 경쟁을 활성화해 일본 경제구조개혁을 촉진하며 WTO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게이단렌의 일본·멕시코 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가와모토 노부히코(川本信彦) 혼다 자동차 이사는 “멕시코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80%가 FTA 미체결에 따른 불이익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일본 기업들의 위기의식을 전했다. 멕시코는 지난 7월부터 유럽연합(EU)과의 FTA가 발효하면서 유럽기업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는 미국 수출용 공장에 부품을 수출할 경우 관세를 면제해 주는 조치(마킬라도라)를 취하고 있지만, 이 역시 내년부터 원칙적으로 5%의 관세가 부과돼 일본 기업의 멕시코를 통한 대미 수출전략에 차질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하면서 항상 ‘단서조항’을 붙인다. 그것은 ‘WTO와의 정합성’이다. 이는 일본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배타적인 FTA를 추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변국들의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다.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를 역임한 이토 다카토시(伊藤隆敏) 대장성 부재무관은 “일본이 WTO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2국간의 배타적인 자유화 협정이나 농산물을 제외한 부분적인 협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국가들이 있다”면서 FTA가 WTO의 한계를 넘어 체결 당사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이득을 주는 ‘윈-윈 게임’을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이 FTA를 추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농수산물 부문의 개방이다. 싱가포르와의 FTA 추진이 조기에 합의될 수 있었던 것은 양국간 농산물 교역의 비중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멕시코 등 다른 나라와의 교섭에 있어서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자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인 리더십과 결단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 iychang@fnnews.com 【도쿄=장인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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