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이제는 안 팔아야 산다/임관호 증권부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2.03 10:27

수정 2014.11.07 12:03


올해 주식시장도 불과 18일만을 남겨놓고 있다. 올해도 어려운 한해였다. 3년간의 주가조정에도 불구하고 북한핵문제, 사스사태, 이라크전쟁, SK글로벌사태, 카드채 위기, 내수부진까지 굵직굵직한 악재들로 투자자들이 몸살을 앓았다.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3월17일 연중최저치(512.30)보다 60% 가깝게 올랐지만 국내투자자의 체감지수는 여전히 500포인트대에 머물고 있다. 한마디로 ‘외국인만의 잔치’였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올들어 13조원어치의 주식을 순수하게 사들이며 외끌이 장세를 연출했다. 외국인의 시가총액비중이 자본시장 개방 이후 처음으로 40%를 돌파했다.

주식 직접투자시장의 외국인 비중 40%. 한국자본시장의 세계화수준을 가히 짐작케 하는 대표적 수치다. 일부 선진국 증시보다 높다. 대주주 등의 비중을 제외하면 개인과 기관의 비중은 합쳐 봐야 고작 30%선에 불과하다. 외국인이 국내증시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외국인의 증시파워는 기업들의 주총현장에서 이미 익숙한 모습이다. 배당요구를 넘어서 경영개입, 적대적 인수합병까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들은 시장개척전략보다는 경영권방어에 설비투자 ‘탄알’을 동원하기에 바쁘다.

개인투자자들이 별 재미를 못보고 한해동안 주식시장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슬픈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외끌이 장세에 대한 경제적 효과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시장의 자립자존이 상실된 세계화’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외국인 40% 신드롬’은 조만간 간접투자시장에서도 벌어질 전망이다. 현투증권을 인수한 푸르덴셜이 제투증권을 합병하면, 22조원이 넘는 수탁고로 삼성투신을 제치고에 투신시장 1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로써 외국계 투신의 시장점유율은 30%를 넘어서게 된다. 간접투자시장의 외국인 ‘접수’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30조짜리 ‘거함’ 대투와 한투증권에 관심이 모아진다. 정부는 일단 가격만 맞는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국내외 회사를 가리지 않고 팔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투와 한투가 외국사에 넘어간다면 간접투자시장은 ‘외국인 40% 신드롬’이 아니라 ‘60% 신드롬’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한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채권시장을 포함한 한국 전체 증권시장을 맘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점 때문에 그 심각성이 ‘주식비중 40%’보다 클 수 있다.

더 큰 걱정은 이제 갓 태동하는 국내자산운용시장이 기형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금융자산 1000조원, 장롱 속 자금까지 포함할 경우 1300조원규모에 이르는 국내시장은 외국자산운용사들이 노리는 세계 몇 안되는 ‘황금알’이다. 그 규모에 비해 우리 자산운용업계 현실은 아직도 걸음마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될 것이다. 선진금융기법으로 무장한 외국 자산운용사들에게는 한국 자산운용시장은 훌륭한 먹이감임에 틀림없다.

외국계투신사들이 지금까지는 일부 자본출자로, 전략적 제휴관계로 국내시장에 명함만 내민 정도였지만 푸르덴셜의 독자 입성을 신호탄으로 파상공세를 할 것이 뻔하다. 국회에서 대기하고 있는 통합 자산운용업법이 통과된다면 시장진출을 손꼽아 기다리던 외국계 투신사들도 본격 상륙할 것이다.

만약 ‘60% 신드롬’이 된다면 직·간접투자시장을 통한 외국인의 의결권행사에 어느 기업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기업의 모든 이익은 배당에 집중되어야만 한다. 단기이익만을 쫓는 하이에나 펀드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은 특히 성실히 이익봉사에 매진해야 한다.투자는 없다. 자본회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카드채 문제와 같은 금융위기가 일어나서도 안된다. ‘믿을 수 있는 정부’도 앞으로는 위기관리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97년 11월, 광복 이후 최대 국치(國恥)인 외환위기 때는 무엇이든지 팔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유동성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많은 것을 팔았다.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팔았다. 그렇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는 그 프로그램을 중지해야 한다. 산업의 균형을 생각해야 할 때다. 더 이상의 외국매각은 국내산업의 자생력마저 해칠 수 있다.

이제는 안 팔아야 산다.
그렇지만 은행은 산업자본의 소유제한으로 묶여 있고 한투와 대투, 대우증권 같은 큰 매물은 살만한 여력이 있는 기업들이 없다. 인수기능을 대신할 펀드가 필요한 때다.


한가지 제안을 한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투자청’ 재원을 외환보유액이 아니라 20년짜리 장기무기명투자채권으로 하면 어떨까. 넘쳐나는 돈이 문제를 일으키는 현 상황에서 자금도 흡수하고 투자도 촉진하고 우리기업도 사수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닐까.

/임관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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