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태칼럼]‘마 논 트로포’의 미학과 탄핵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3.16 10:55

수정 2014.11.07 20:06


“무쓰 에스 자인?(Muss es sein? 꼭 그래야만 하나)”, “에스 무쓰 자인!(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최근 소더비 경매에서 118만파운드(24억원)에 팔린 베토벤의 마지막 대작 현악사중주 16번 악보에 쓰인 이 수수께끼 같은 메모는, 그 본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란을 빚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 땅의 현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양 정확히 꿰뚫은 예언의 코드다.

온 나라가 뜨거운 정치열기에 휩싸인 오늘, 새삼 진정한 법치의 확립이 우리 사회의 법철학적 이슈로 되면서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이 모두 법의 정의를 찾아 황야를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정치권은 오히려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법치의 후퇴를 초래하고 있다.

법치의 가면을 쓰고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한 노상 카페에서 멀리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느낀 토인비의 비통한 심정을 이제 여의도 의사당을 흘겨보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과 이로 인한 갈등·분열은 여야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서로의 입장에 뿌리깊은 차이가 있음을 잊은 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결과다. 여야의 관계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투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을 때 반목과 불화가 생겨나는 법이다. 우리는 블룸버그통신의 한 칼럼니스트가 지적했듯 국제적인 이미지를 다듬어야 할 때 이상한 광경을 연출하는 바보들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는 4월 총선을 맞는 인도는 5년째 ‘환하게 빛나는 경제호황’을 지속하고 있다고 뉴스위크지가 최근호에서 격찬했다.

최근 5년간 연평균 5.6% 성장을 이루었으며 올 3·4분기에는 정보기술(IT) 산업과 증시 활황에 힘입어 성장률이 8%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중국과 태국 등 경쟁국들도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어 우리 경제만 위기에 봉착한 감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밥그릇을 챙기겠다는 정치권이, 여신 헤라를 희롱하려다 제우스의 분노를 사 불수레에 묶이는 형벌을 받은 익시온처럼 행동한 결과다.

이번 탄핵파동으로 인해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감동을 주는 정치는 고사하고 혐오감만 주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조차 그들은 저버렸다. 정치허무주의, 정치무용론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대통령은 전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유일한 공직자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유성(流星)이 아니라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운항하는 유성(遊星) 같은 존재로 국정의 중심에 서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 같은 대통령을 가졌는지 자문해 보자.

또 한편으로 오늘의 국회는 정당정치를 지향함에 따라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의 성격이 옅어지고 정당대표와 의원들이 당리당략에 의해 움직이는 기관으로 전락해 가는 감을 준다.

정당은 국민의 정치의사 형성이라는 본연의 임무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탄핵제도가 헌법보장적 성격을 지니지만 오늘날 그 가치와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 제도를 둘러싸고 유용론과 무용론이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소추권의 행사는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의견이다.

그런데 우리는 혹 모기보고 칼을 뽑은 견문발검(見蚊拔劍)의 우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사필귀정의 칼을 휘둘렀는지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누가 호소했던가. “절제하지 않으면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골프 퍼팅에서는 지나침이 미덕이다.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우리 사회는 각 이해집단들이 지나치게 자신들의 입장을 결사적으로 관철시키려는 병폐가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또는 이룰 수 없다는 말에 너무 취한 탓일까.

매사에 격정적인 이탈리아사람들은 스스로를 제어하는 비법이 있다. 바로 ‘마 논 트로포(ma non troppo,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다. 그들은 이 제어 계명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마 논 트로포’는 속도는 물론 색상, 감정까지 모든 것이 한계를 일탈하지 않도록 해주는 만능키다.

우리가 이 덕목을 언행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제의 여러 현안들, 즉 비정규직 문제·쌀시장 개방·자유무역협정(FTA)추진·주5일제·노사간 임금협상·스크린 쿼터제 등을 비롯해 여야간 갈등, 계층간 반목사태 등 정치사회문제도 원만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생결단의 극단적 자세는 떨치고 가야 할 독선과 아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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