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욕을 묻어서일까. 맞닿은 하늘이 한층 가깝게만 느껴진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성당은 여전히 지친 영혼의 따스한 안식처다. 성당은 죄를 구원으로, 갈등을 화해로 전이시키며 이 시대 마지막 ‘피난처’ 역할을 굳건히 담당한다. 격식화된 계급과 강조되는 교리들로 언뜻 폐쇄성으로 오인받지만 그 안에는 하늘을 보호하고 부족한 이성에게 정의를 안겨주려는 고귀한 ‘순결주의’가 담겨 있다.
푸른눈을 가진 이방인의 소개로 이 땅에 천주교가 소개된지 200여년. 하지만 성당은 이제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넘어서 사회와 호흡하는 공용의 장소로 기능을 차츰 넓혀간다. 특히 강원도 산골짜기로 박해와 고난을 피해 자리잡은 고(古)성당들은 여전히 옛 전설을 간직한 채 소시민의 평안을 안겨주고 있다. 그 거룩한 꿈과 이상을 품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자리잡은 옛 터전을 향해 의미있는 순례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십자가의 길’을 따라 속지의 발걸음을, 풍수원성당=TV 드라마를 통해 이미 알려진 강원도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 정확한 주소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1097번지로 다소 외진곳에 위치해 있다. 신유박해 당시 40여명의 신자들이 도시를 빠져나와 강원도 산골짜기로 피신한 것이 이처럼 외진곳에 위치한 이유다. 1907년에 지어져 강원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딕 성당은 외관상으로 여타 성당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낡은 마루가 깔린 내부로 들어서기 위해 신발을 벗어야 하는 점에선 고성당의 향기가 물씬 베어 있다. 성당 뒤편 사제관을 수리해 만든 유물전시관에는 성당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데 일조한 2대 주임 정규하 신부(1863∼1943)의 유품을 비롯, 당시 쓰이던 오르간, 성서 등이 진열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당 왼편에 자리잡은 ‘십자가의 길’ 언덕은 아늑한 풍채를 유지해주는 성당의 보배다. 해당화, 냉이 등 눈부신 색깔의 꽃들이 언덕을 따라 피어 있지만 계단 곳곳에는 골고다 언덕을 빗대어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석상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이 언덕을 통해 일그러진 자화상을 속죄토록 하자는 의미다. 언덕을 넘으면 묵주동산, 대형 십자고상, 마리아 상 등과 마주치며 100�V의 사잇길이 계속 이어져 묵상 코스로 알맞다. ww.pungsuwon.org.(033)342-0035.
◇붉은 벽채와 회색 버팀목이 아름다운 조화, 용소막성당=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에 위치한 용소막 성당은 성당 뒷편 나즈막한 언덕과 고목들로 어우러진 마을내 안식처 역할을 한다.
용소막 성당 역시 병인박해를 피해 전국을 전전하다 마련된 천주 거처. 성당 초대 주임은 프랑스 출신의 프와요 신부로, 공사를 시작한 지 3년만인 1915년 완공됐다.
춘천교구였다 지난 1965년 원주교구로 편입된 용소막 성당은 아담한 벽돌로 쌓아올린 전통 양옥식 건물로, 다른 성당보다 지붕이 가파른게 특징이다. 건축당시 중국인 기술자가 도면과 달리 기둥을 무턱대고 잘라버린게 원인.
문고리서부터 벽면까지 성당 전체는 대부분 낡은 흔적 그대로다. 그러나 붉은 벽체와 회색 버팀벽에서 내뿜는 오묘한 조화는 성당을 한층 안정감있게 유지해준다.
성당 왼켠에는 지난 1976년까지 용소막 성당에서 사제로 봉사 했던 선종완(로렌조) 신부 유물관이 있다. 용소막 성당 앞마당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하늘로 오르기까지 그가 갖고 있던 유품·서적 400여점이 고이 모셔져 있다. 성당 뒤편 계단을 오르면 사제관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가면 해질녁마다 은은히 울리는 성당 낡은 종이 고풍지게 매달려있다. (033) 763-2341.
◇소박함으로 하늘을 안아보자, 대화성당=성당은 하늘을 찌르듯 높이 솟구쳐 있지만은 않다. ‘내 탓이요’를 외치듯 땅에 바짝 엎드린 겸손한 모습은 오늘날 천주교회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기도 한 강원도 평창군 대화 성당은 이같은 소박함에 한껏 충실해 보인다. 발을 들여 놓으면 언뜻 성당이라기 보다 미술관에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성당에 흔히 있는 십자가, 성모상 등은 당초 우리가 예상했던 모습을 벗어 던진채 하나의 작품으로 신자를 맞고 있다.
지난 1998년 완공된 대화성당은 조각가 한진섭, 도예가 변승훈 등이 참여해 건축된 대표적인 현대식 성당이다. 앞마당은 잔디가 넓게 깔려있고 정문에서 성당입구까지는 두터운 주춧돌로 완만한 동선을 그려놓아, 속세에서 멍든 죄를 정죄토록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배려했다.
성당 내부 역시 독특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성수대, 모자이크식 내부 도벽, 단단한 화강암질의 제대, 감실, 독서대 등은 자연미 속에서 은은한 안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스테인글라스로 장식된 성당 창문으로 빛이 떨어질때면 아름답고 고요한 안식이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듯 하다. 또 성당과 한 보폭 떨어진 곳에는 ‘피정의 집’이 마련돼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예술품과 토속 물품이 전시되고 있다. (033)334-2122.
/ sunysb@fnnews.com 장승철기자
■사진설명
창가로 스며드는 은은한 오후 햇살이 낡은 마루와 둥근 천장으로 이루어진 성당 내부를 촉촉히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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