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行一致의 삶을 담은 ‘선비의 자화상’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이다. 특히 문인화는 그림의 소재인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빌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
비록 사군자에는 들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나무가 있다.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가 그것이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서 소나무가 등장하는 그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나무도 소나무였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 능호관 이인상(1710∼60)의 ‘설송도’, 이재관의 ‘송하처사도’, 북산 김수철의 ‘송계한담도’, 허유의 ‘노송도’, 민화 등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옛 시인묵객들은 물론 일반인까지 소나무에 의지했다. 소나무는 삶의 동반자였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생태에 감동한 사람들이 소나무를 통해 자기심경을 표현했다. 이는 옛 그림의 두 가지 경향, 즉 ‘사실(寫實)’과 ‘사의(寫意)’ 중에서 사의로 소나무를 그리고 대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실은 실재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뜻이고, 사의는 사물의 외형을 취하되 마음속의 뜻을 표출되게 그린다는 뜻이다. 문인화는 주로 사의적인 요소가 강하고, 화원이나 전문가의 그림은 사실적인 경향을 띠었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능호관은 사의의 대가였다. 미술사가 이동주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 그림에서는 사의에 비중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능호관에 와서 사의적인 그림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설송도’는 능호관의 청정한 인품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작이다.
■소나무로 그린 지조와 절개
때는 눈 오는 날인데, 날씨마저 흐리다. 화면 가득 두 그루의 소나무가 클로즈업 되어 있다. 한 그루는 화면의 중심에서 기둥 역할을 하듯이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옆으로 비스듬히 눕혀서 교차되게 그렸다(직선과 곡선의 조화!). 또 소나무의 윗부분을 과감하게 잘랐다. 이로 인해 소나무의 곧고 힘찬 모습이 더 잘 살아난다.
이 대담한 화면구성은 능호관의 다른 그림인 ‘검무도’에도 나타난다. 인물의 배경에 이와 동일한 포즈의 소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이 소나무는 ‘홀몸’이 아니다. 등걸과 가지마다 눈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은 엄동설한 같은 거친 세파를 의미한다. 또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 바위는 토양의 척박함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소나무는 거친 세파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꿋꿋하다. 속된 일에 물들지 않고자 하는 절개가 느껴진다. 전봇대처럼 직립한 굵직한 등걸은 굳은 지조와 기상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소나무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면 여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심기가 어렵다. 그만큼 심지가 곧다. 또 변함없이 푸르다. 듬직하다. 이런 생태가 소나무를 흠모하고 예찬하게 만든다.
■삶을 담은 그림, 그림을 닮은 삶
이 그림의 가치는 능호관의 인물됨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효종의 뜻을 받들어 북벌론에 찬성하며,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과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대부들은 이런 능호관의 배청사상과 지조를 높이 평가하며 존경했다.
또 부와 권세에 굽히지 않는 곧은 성격의 지사였다. ‘능호관’이라는 호도, 가난한 그를 위해 친구들이 남산 기슭에 사준 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경관이, 신선들이 산다는 ‘방호산’을 능가할 만큼 빼어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호를 ‘방호산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으로 능호관이라고 지었다. 그는 이 작은 초가집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일에는 일절 마음을 두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을 좇지도 않고 바른 길만 걸었다. 그런 모습이 곧추선 소나무의 굳센 기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설송도’는 언제나 꼿꼿하고 원칙을 중시했던 능호관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그에게 그림은 자기수양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강성한 자태의 소나무를 그리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사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런 변화는 인간의 굳은 결심마저 균열을 낸다. 문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성록’을 써듯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에서 능호관의 소나무도 치열한 자기성찰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언행일치의 삶이 낳은 ‘그림의 진신사리’가 소나무라고 말이다. 만약 그림이 삶을 담고, 삶이 그림을 닮는다면, 능호관의 그림이 천상 그 꼴이다. 그에게 그림과 생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키포인트=생각은 씨앗이다. 그 씨앗은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다.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다. 실천이 안 된 생각은 ‘작심삼일’로 빠지고, 실천이 된 생각은 ‘작심평생’으로 이어진다. 실천은 생각에 날개를 달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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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설명=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수묵, 117.2×52.6㎝,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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