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들고 해외주식투자에 나서기로 했다. 망조(亡兆)의 시작이다. 올해가 외환위기를 맞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인데 이를 축하라도 하듯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들고 축포를 쏘아 올리려 하고 있다.
물론 자존심이 세기로 소문난 한은의 명석한 임직원들은 당장 볼멘 소리를 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소리를 한다고. 외환보유액이 모자라는 상황도 아니고, 외환보유액을 몽땅 들고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주식투자라고는 해도 베트남처럼 아주 위험한 곳에다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운용위탁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외국의 유수한 회사를 골라서 맡기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해외 주식투자 그 자체만 보면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은은 더 큰 그림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한은보다 세부자료에 무지한 일반 대중은 본능적으로 더 큰 그림을 보면서 한은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이 보는 더 큰 그림에는 어떤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우선 한은과 한국투자공사(KIC)가 드디어 수익률 경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다. 한국투자공사가 쪼개 받은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큰 것 한 건’을 해서 대중의 갈채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한은을 이런 지경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물론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은 당연히 한국투자공사를 출범시킨 재정경제부다.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장난을 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불건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재경부 퇴임직원의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추진한 일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치장한 술수도 속보이는 것이었다.
이 때 한국투자공사 출범을 반대했던 한은의 논리는 멋있었다. 물론 한은이 반대한 진정한 이유가 퇴임직원의 일자리 창출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의 발로였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외환보유액은 안정적 운용이 최우선의 가치인데 한국투자공사가 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니 중단해야 한다는 한은의 반론은 경제이론의 측면에서도 지당한 것이었고 대중의 본능적인 인식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한은의 논리는 180도 물구나무를 섰다. 며칠 전 한은의 보도자료는 과거 한국투자공사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던 재경부의 논리를 사실상 그대로 판에 박은 듯했다. 따라서 한은의 현재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점은 과거 한국투자공사를 반대하던 한은의 논리를 그대로 퍼오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나마 한은 내에 양식있는 인사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도 있다. 물론 주식투자가 위험한 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외환보유액이 240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으니 재주가 없지 않느냐. 거기다가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달러화를 사들이고 있으니 환차손이 많이 나서 한은이 이익도 못내고 오죽했으면 중앙은행이 서울 남대문세무서로부터 세무조사까지 받겠는가. 한편으로는 달러도 처리할 겸, 다른 한편으로는 이익도 좀 낼겸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
이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더 큰 그림을 애써 외면하고 하는 말이다.
우선 외환보유액이 넘친다는 말을 중앙은행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시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당장 주변국으로부터 현재의 환율이 적정환율이 아니라고 지적받게 되고, 십중팔구는 원화 절상 압력이 쇄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이나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적정성 여부에 대해서는 그 어떤 몸짓도 매우 조심해서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외환보유액이 적정 수준을 상당히 초과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교과서적인 해법은 자명하다. 외환보유액을 점진적으로 축소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화절상을 용인하는 것이다. 원화를 인위적으로 저평가시켜 외환의 공급초과가 발생하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넘쳐흐르는 외환보유액을 걱정만 하는 것은 외환당국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나라 정책당국은 전통적으로 원화는 저평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중상주의적 사고를 견지해왔다. 물론 원유와 철광석 등 주요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는 경제구조상 외화획득이 생명줄과 같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거의 10년 동안 대규모의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경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경제의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재경부와 한은은 머리를 맞대고 원화의 적정 수준을 모색하고 만일 현재 수준이 여기서 벗어나 있다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목표수준으로 근접하는 경로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큰 그림이다. 물론 대중이 모두 이런 그림에 동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외환보유액을 들고 재경부의 조종을 받는 한국투자공사와 한은이 똑같이 해외 주식시장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결코 기분좋은 모습이 아니다. 한은은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3년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newsleader@fnnews.com 이지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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