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우지란 새가 있다. 몸 길이가 80∼100㎝가량 되고 목이 길다. 겨울 우리나라 남쪽 바닷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철새다. 일본에서는 가마우지를 써서 낚시를 하는 모양이다. 먼저 긴 목을 끈으로 묶어 죈다. 이러면 물고기를 잡아도 목에 걸려 삼킬 수가 없다. 낚시꾼은 가마우지가 사냥한 물고기를 가로채기만 하면 된다.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더니 꼭 그 짝이다.
지난 1980년대 말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 신세에 비유한 적이 있다. ‘한국의 붕괴’라는 책을 통해서다. 한국 경제가 아무리 잘 나가도 핵심 부품을 일본에서 조달하는 한 실익은 일본이 챙긴다는 논리였다.
책 제목부터 괘씸했다. 게다가 당시 우리 경제는 이른바 3저 호황에 힘 입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 경제는 엔고와 거품 경제 붕괴의 덫에 걸려 얼굴이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이어 캄캄한 불황 터널 속에서 10년을 잃어버렸다. 무너진 것은 한국 경제가 아니라 일본 경제라며 쾌재를 부를 만했다.
일본이 주춤할 동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들이 그 틈새를 파고 들었다. 어차피 가격 경쟁력은 중국에 뒤질 것으로 보고 고가 브랜드 전략에 주력했다. Samsung, Hyundai, LG 브랜드를 띄웠다. 그 덕분에 일제보다 비싼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속출했다. 브릭스(BRICs) 등 신흥시장에서도 한국산은 명품 대열에 올랐다. 일본의 벽을 넘어섰다는 자긍심에 마음 한 구석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불행히도 요즘 다시 가마우지 경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대일 무역적자가 당최 줄어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줄기는커녕 작년에만도 253억달러로 사상 최대 행진을 이어갔다. 대중 무역흑자 209억달러를 다 까먹고도 44억달러 밑지는 장사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국이 너무 ‘설치고 돌아다녔다’고 판단한 걸까, 일본은 한술 더 떠 옛 영토 회복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엔저(低)는 그 강력한 무기가 됐다.
마쓰시타전기는 작년 추수감사절 연휴 때 미국에서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 값을 50%나 깎아주는 깜짝 이벤트를 실시했다. 미국 최대 가전 유통업체인 베스트바이에서는 42인치 제품을 999달러에 내놨다. 비슷한 삼성전자 제품은 1200∼1500달러 수준이라니 일제=고가 등식은 옛말이다.
일본의 저가품 공세는 신흥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렉서스로 유명한 도요타자동차는 중국·인도 등 이머징 마켓을 겨냥해 500만원대 초저가 자동차를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혼다자동차 역시 올해 안에 인도 공장의 생산 능력을 현재의 2배인 10만대로 높일 계획이다.
일이 참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다. 샌드위치가 따로 없다. 누가 뭐래도 아직 전자·자동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브랜드는 일제다. 그런 일본 기업들이 삼성전자, 현대차보다 싼 값에 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마치 기력을 회복한 낚시꾼이 다시 가마우지를 길들이려고 작정한 듯하다. 아니 아예 가마우지를 잡으려는 기세다. 목을 아주 세게 죄고 있다. 예전처럼 물고기를 잡는 족족 주인에게 바치는 가마우지 신세로 만족하라는 걸까. 삼성전자가 소니를 앞선 것 갖고 너무 재지 말라는 경고일까.
일본인들이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발빠른 구조조정에 찬사를 보낼 때 알아챘어야 했다.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마음)를 간파했어야 했다. 고무로 나오키는 일본인답지 않게 혼네를 드러냈던 인물이었으나 우리는 들뜬 나머지 애써 그를 무시했다. 지금부터라도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의 역습에 맞설 전략을 짜야 한다. 노조가 성과급 더 달라고 파업하고 대통령이 이념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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