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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박현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4.05 16:39

수정 2014.11.13 13:38



※따뜻한 시선으로 발효시킨 ‘한국 여인像’

화가 박수근(1914∼65)은 왜 유명할까? 연신 고공행진중인 국내 최고의 작품가격 때문에? 아니면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여서? 모두 맞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그가 화가로서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귀감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수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박수근은 가장 서민적인 화가로 꼽힌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독학으로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화강암 재질을 살린 투박한 마티에르 기법은 박수근이 창조해낸 가장 한국적인 화면으로 평가 받는다. 단색조의 회색톤을 기본으로 깔고, 단순화된 형태와 선묘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다. 그곳에는 항상 따스한 시선으로 발효시킨 서민의 생활이 펼쳐진다.


■밀레에게 반해서 거침없이 잡은 붓

박수근에게도 북두칠성 같은 삶의 ‘롤모델(역할모델)’이 있었다. ‘이삭줍기’와 ‘만종’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바로 그다. 학력이라고는 양구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인 그는 어려서부터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 커다란 충격과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농군 부부가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이 그림은 어린 박수근에게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농군 부부는 결코 초라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난 밀레는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경건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런 밀레를 반 고흐도 흠모했다. 반 고흐는 밀레가 지향한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삶까지 닮고자 했다. 그래서 농부나 탄광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며, 진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에게 밀레는 영원한 우상이었다. 그는 밀레를 거울삼아 그림을 독학했다.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해결했다. 또 백내장으로 왼쪽 시력을 잃고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밀레는 박수근을 밝혀준 첫 번째 빛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빛은 따로 있다. 아내 김복순이 바로 그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 밖에” 없었던 그는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화가로서 꿈을 펼칠 수 있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을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낸 구애의 편지에서) 그는 아내에게 발견한 한국의 여인상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아내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주된 것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살다간 여인들의 초상을 만난다. 그들은 날씬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다. 시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펑퍼짐한 아줌마들이다. 그것도 노는 여인이 아니라 ‘일’하는 여인이다. 머리에 짐을 이거나 아이를 업고 절구질과 빨래를 하는 식으로 2중 3중의 일을 동시에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내의 빛으로 별이 된 화가

‘절구질하는 여인’(1954)은 아내 김복순이 아기를 업고 절구질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단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코, 입이 비교적 뚜렷한 얼굴, 큼직한 손, 다리를 넓게 벌린 동적인 자세 등 일에 몰두하고 있는 주부의 모습이 생생하다.

박수근의 다른 그림이 그렇듯이 이 그림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따스하다. 그것은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난이 일상이었던 시절, 아내는 낮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일을 하거나 뜨개질로 푼돈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사정이 급하면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감까지 팔았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소망은 그이가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로 대성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도록 전력을 기울여 내조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화가 박수근’ 뒤에는 이런 아내가 있었다.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나눠 진 아내가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처럼 뜨겁게 내조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은 어쩌면 ‘남편 박수근’이 아내에게 바치는 ‘헌화가(獻畵歌)’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박수근이 그렸지만, 그를 화가로 키운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촛불처럼 자신의 빛으로 남편의 화업을 찬란하게 밝혀주었다.

반 고흐처럼 박수근도 사후에 작품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지금도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진기록을 경신하며 가격이 상승중이다. 우리에게 박수근이 소중한 것은 개성적인 작품세계 때문은 아니다. 그것 못지않게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큰 꿈을 꿀 수 있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밀레의 빛을 좇다가 아내의 빛을 받아서, 우리 미술사의 하늘에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우리는 그 별을 보며 또 다른 꿈을 꾼다.

/artmin21@hanmail.net

※키포인트=빌 게이츠는 존경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를 닮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빌 게이츠를 롤모델로 삼는 것은 놀라운 성공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큰 꿈을 꾸고 펼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도판설명=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97㎝, 1954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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