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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리뷰] 바로 지금이 행복이다 ‘스핏파이어 그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5.26 22:00

수정 2014.11.05 14:41

◇ 언제: 2007년 5월 16일 오후 8시
◇ 어디: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 출연: 조정은(퍼시) 이주실(한나) 이혜경(셸비) 조유신(조) 최나래(에피) 송영규(케일럽)

역설적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몹쓸 것 중의 하나가 ‘희망’이란 말이 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오늘을 포기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희망이 반드시 이뤄질 거란 기약도 없이 말이다. 소중하기 짝이 없는 ‘오늘’을 포기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스핏파이어 그릴’(Spitfire Grill)은 우리에게 오늘을 포기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 저 하늘과 바람, 구름과 숲, 정다운 이웃을 충분히 즐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의붓아버지를 죽이고 5년 동안 감방에서 매일 같은 음식을 먹다가 ‘커피 잔에 수다가 넘치는 작은 마을’ 길리앗으로 가석방된 여주인공 퍼시(조정은)다. 누구보다 큰 상처를 안고 살았기에 그녀의 말에는 진정성이 있다.

보안관 조(조유신)는 이방인 퍼시를 마을의 유일한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에서 일하도록 주선한다. 조는 아버지한테 숲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 언제든 그 숲을 팔아 도시로 나가는 게 꿈인 청년이다. 식당 주인 한나(이주실)는 베트남 전쟁에서 탈영한 뒤 아무도 몰래 숨어사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한나의 조카 케일럽(송영규)은 늘 채석장 사장 시절의 빛바랜 영광을 잊지 못한다. 케일럽의 아내 셸비(이혜경)는 성깔 있는 남편 때문에 당최 기를 펴지 못한다. 우편배달부로 나오는 초절정 수다쟁이 에피(최나래)는 수다거리를 찾아 늘 안절부절 못한다.

이렇듯 길리앗 마을 주민들은 누구나 자기 몫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안고 말이다.

그러나 퍼시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의붓아버지한테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가졌을 때 퍼시의 엄마는 입 닥치고 있으라고 되레 딸을 구박했다. 퍼시가 낳아 기르려던 아이는 의붓아버지의 구타로 유산된다. 퍼시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의붓아버지는 모텔에서 다시 의붓딸을 범한다. 그 때 퍼시는 면도칼을 집어든다.

퍼시가 쇠창살의 어둠을 넘어 세상의 빛으로 나왔을 때 길리앗은 천국 그 자체였다. 이 곳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퍼시의 빛이 온 마을에 퍼진다. 보안관 조는 퍼시와 사랑에 빠져 숲을 사랑하게 된다. 퍼시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셸비는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다. 한나는 숨어 사는 탈영병 아들과 극적으로 화해한다. 나아가 ‘스핏파이어 그릴’을 외부인에게 팔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퍼시와 셸비에게 식당 운영을 맡긴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탄탄한 스토리에 있다. ‘스핏파이어 그릴’은 그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공연시간이 막간 빼고 2시간 10분으로 꽤 긴 편에 속하지만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극이 긴장감 있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퍼시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할 때 셸비가 콩알만큼 작아진 퍼시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대목을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셸비 역의 이혜경은 깨끗한 음색과 또렷한 딕션으로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 마지막 여운 한가락에도 여리지만 강한 숨결이 배어 있다. 창작 뮤지컬 ‘첫사랑’에서 선이(해이)가 해수(조정석)에게 “사,랑,해…”라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느낌은 아주 비슷했다. 배우의 모든 것이 노래 속으로 녹아들어간 느낌이다. 이혜경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조정은과 아주 매력적인 짝을 이룬다.

노래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에피 역의 최나래는 제 몫 이상을 했다.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는 에피의 수다가 상책이다.

노래는 참 특이하다. 홍보물에서는 꺾기 창법이라고 했는데, 미국식 타령조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돌리 파튼의 컨추리풍 같기도 하다. 처음엔 살짝 귀에 거슬릴 수 있으나 조금 지나면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거다.

‘스핏파이어 그릴’은 영화(1996년)가 먼저다. 뮤지컬은 2001년 뉴욕에서 초연됐다.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마지막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당초 이 작품은 미국의 가톨릭 비영리 재단을 이끌던 로저 코츠(Roger Courts)라는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살인자가 마을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종교적 색채가 묻어 있는 건 이 때문일 게다.

퀴즈 하나 풀어보자. 숨어 사는 한나의 탈영병 아들 일라이가 퍼시를 만나 뭔가를 건네준다. 작은 공작품이다. 이를 본 한나가 울음을 터뜨리고 모자는 결국 화해한다.
이게 뭘까. 식당 이름 ‘스핏파이어 그릴’에 힌트가 들어 있다.

참, ‘스핏파이어 그릴’은 더블 캐스팅이 없다.
고를 거 없이 그냥 날 잡아서 보면 된다.

/paulpaoro@naver.com 곽인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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