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혼자인 상태를 마냥 즐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비록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실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외로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항상 어딘가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필요로 한다.
임성수가 그린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방 한구석에 항상 자신의 세계를 놓아두고 있나 보다"하는 생각. "외로우면 그곳으로 달려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로 방 밖의 세상과 이야기하나 보다"라는 생각들.
임성수가 그린 방 안의 세계는 방 밖의 세상에서 부조리와 냉혹함, 그리고 잔혹함만 건져 올려 팬시하게 다시 만든 판타지의 영역이다. 그가 그린 화폭에는 배경에 대한 설명적인 묘사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 그 휑한 공간 속에서 그의 캐릭터들은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한 고리마냥 살고 있다.
반짝이는 큰 눈망울을 한 아이는 보이는 것처럼 순진하지 않다.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이의 그 큰 눈망울은 순수함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그 과도한 표현으로 인해 순수함의 통상적 의미는 탈각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귀여운 곰돌이의 눈알은 임성수가 그린 이 어린이에게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 끼의 식사정도이다. 피를 흘리며 허우적대는 곰돌이 인형들은 아이의 주린 배 앞에서 아무런 동정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곰돌이 인형들은 메탈리카의 '마스터 오브 퍼핏'처럼 세상의 조종자이다. 거대한 코끼리의 배 안에서 귀여운 얼굴을 한 곰돌이 인형의 눈은 게슴츠레하게 그려져 그 포악한 지배욕을 표현한다.
그가 그린 캐릭터에서는 감정을 찾아 볼 수 없다. 감정대신 즉자적인 반응이 존재한다. 그의 캐릭터들이 나타내는 표정은 재밌다, 아프다, 심심하다 같은 것들이다. 이런 동사는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아니라 상태를 표현하는 어휘이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타인을 죽일 수도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좀비'같은 존재이다. 이들은 감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며 임성수의 그림은 세계의 잔혹함에 대해 어떤 감정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이들은 그래서 방관자이며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단지 자신의 욕망에 맞춰 충실하게 작동하는 가학기계들이다.
그의 시선은 세계의 편견과 상식의 균열을 냉정하게 발견하는 건조한 관찰자의 시선이며, 임성수의 그림은 다 크지 못한 어린아이의 고독한 유희처럼 자신의 파괴적 충동이 순진무구한 캐릭터로 표현된 것이다. 방 밖의 세계에다 대고 휘두르는 임성수식의 가학적 표현과도 같다.
나는 의문이 든다. 감정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는 임성수가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왜냐하면 그 표현 양상이 어떻든 회화가 단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양태 보고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캐릭터와 판타지 월드가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우회적이면서도 번뜩이듯 드러내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지금 건조한 임성수에게 필요한건 어쩌면 유머라는 모이스처라이저가 아닐까한다. 유머는 세계의 몸통도 들어올려 흔들 수 있는 강력한 파워이다. 나는 임성수의 그림에서 그런 유머감각이 새싹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인지 그에게 계속 기대하게 된다.
/오현미(서울시립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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