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부츠가 대유행이다. 초가을부터 부츠를 신은 여자들이 거리에 많이 보이더니, 11월이 되니 둘 중 한 명은 부츠를 신고 있는 것 같다. 딸아이에게도 카우보이 같은 부츠를 사주려고 함께 명동으로 나갔다. 모처럼 나가본 명동에는 변함없이 사람들로 발 디딜 곳이 없다.
아이들 신발을 파는 곳은 좀처럼 눈에 안 띄고 한참을 떠밀려 걸어 다니다가 지쳐갈 무렵 한 곳을 발견했다. 굶주린 듯 정신없이 이것저것 골라보다가 둘 다 꼭 마음에 드는 것을 마침내 찾아냈다. “아이들 부츠는 얼마인가요?” 아뿔싸. 가게 주인에게 생각을 이미 다 노출시켜 놓고서는 그제서 가격을 물어본 것이다. 본인이 가진 패를 상대편에게 전부 보여주고서는 어떻게 흥정을 하겠는가.
가게 주인은 이미 거만한 태도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이거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니라서 그만큼 받아야 되요. 아니면 저희도 남는 게 없어서 못 팔아요.” 딸아이는 벌써 골라놓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결국 필자는 가게 주인과의 게임에서 완패를 인정해야 했다. 거의 주인이 부르는 가격 그대로 부츠를 산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절반 값에 샀을 물건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필자는 여전히 약게 사는 점에 있어서는 국민의 평균 수준 이하다. 그러다보니 평균 이상으로 잘 하는 것도 생겼다. 바로 자기합리화다. ‘비싼 만큼 더 기분 좋게 신으면 그만이지’ 하고 어느새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라 투르가 그린 ‘속임수’라는 그림을 보면, 돈내기 카드놀이를 하면서 서로 팽팽히 눈치를 보며 견제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왼쪽에 앉은 남자는 등 뒤 허리춤에서 다른 카드를 슬쩍 꺼내서 자기가 가진 패를 바꿔치기하려고 하고 있다. 가운데 앉은 여자의 전략은 다르다. 이 여자는 시녀를 시켜 슬쩍 포도주를 채워주러 온 것처럼 위장하게 한 후 다른 사람이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는지 귀띔으로 전해 듣는다. 모두들 눈초리들이 범상치 않다.
그런데, 오른쪽에 앉은 남자는 아둔하게도 지금 게임 판에서 무슨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게다가 특별한 전략도 없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이 남자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동병상련인가 보다. 하지만, 이 셋 중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게임이 끝나봐야 안다. 엉뚱하게 오른쪽 남자가 이기는 수도 있다. 자신의 패를 들키지 않고 잘 지키면 상대방의 속임수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콩 심은 데에는 콩 난다고 딸아이도 또래에 비해 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딸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빨리 깬 아이가 하나 있다. 그 아이와 이야기하다보면 어른도 어느새 말려들 정도다. 며칠 전 딸은 그 친구와 둘이서 용산역에 있는 쇼핑몰을 구경 갔다. 엄마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딸의 말에 친구는 비웃으며, “너 아직도 엄마에게 모두 다 이야기해?” 하고 자극했다. 용산역까지는 그 아이를 따라 버스를 타고 간 모양이었는데, 구경을 다 하고 돌아올 때가 문제였다. 친구가 “난 여기서 지하철타고 삼촌네 집에 갈 거야. 넌 혼자 집에 갈 수 있지?” 라고 하더란다. 딸은 혼자 버스 탈 줄 모른다고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했다. ‘그것도 몰라? 너 애기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왔듯이 돌아가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는데, 막상 길에 나와 보니 어느 방향에서 타는지도 모르겠고,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필자는 전화로 “거기 버스정류장 앞 매점에서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어. 누가 도와준다거나 데려다준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가지 말고 알았지?”라고 주의를 주었다.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 살면서 어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교육해야 하는 현실…. 아이는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괴물처럼 무서워 보였다고 했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날 아이가 보았던 사람들처럼 위협적이다.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어린 시절 앙소르의 어머니는 카니발 가면 같은 것을 파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앙소르는 가게에서 카니발 가면을 써 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가면을 썼다가 벗을 때면 좀 전의 밋밋하던 그 사람은 사라져 버리고 가면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는 듯 느껴졌다. 음흉스러운 가면을 써 본 사람은 가면처럼 음흉스럽게 변해 있고, 교활하게 생긴 가면을 쓴 사람은 가면처럼 교활해져 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온갖 얼굴들이 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드러져 나온다는 것을 어린 앙소르는 발견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면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언제나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 혼자 세상을 약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속임수에 능란하고 약아빠진 가면의 얼굴로 비칠지도 모른다. 또한 약지 못하다고 해서 늘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주어지는 행운과 불운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츠 값을 두 배나 더 내고 샀으니, 어디에선가는 절반의 노력을 들이고 무엇을 얻는 행운이 올 것이라 믿는다. 약아지려고 부득불 애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아보련다.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조르주 드 라 투르, '속임수', 16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x146㎝, 루브르 미술관.(위쪽 작품)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 1899, 캔버스에 유화, 120x80㎝,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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